"자유가 보장된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처음 우리대학교에 입학했던 날, 나는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이제 막 대학생이 됐다는 사실에 조금씩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백양로가 끝날 무렵 바라본 계단들 사이 비석에 새겨진 성경 구절은 나에게 압박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직 대학 진학이 목표였던 고등학교 생활에 질린 나는 ‘자유롭게 자신을 발견해 보자’고 다짐했건만, 그 비석은 마치 모든 학생들에게 ‘너희가 진리를 찾아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강요하는 듯했다.

▲‘진리는 천천히 빛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면 모두가 눈을 멀 것이므로(The Truth must be dazzle gradually Or every man be blind)’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와 같이 진리는 찾기도 어렵고, 설령 그것을 찾을지라도 받아들이는 과정은 더욱 힘들다.

▲진리가 마음에 와닿지 않아서인지 학생들은 이를 포기하는 대신에 마치 ‘학젼을 ‘진리’와 같이 여기고 행동하는 듯하다. 그 바탕에는 상대평가 제도, 교환 학생 기회, 장학금 혜택 등의 학사 제도는 물론, 좋은 직업을 얻고자 하는 개인의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가 자유를 허락할 영역을 주었더라면 ‘그 진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그들이 진정한 ‘진리’를 느끼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학생들은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진리’를 강요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난 7일부터 백주년기념관에서 한 주 동안 계속된 채플 거부 1인 시위는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사적인 욕심과는 달리, 순수하게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드러낸 ‘자유’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남과는 다르게 형성된 자신의 종교관을 인정받고자 하는 ‘종교적 자유’의 목소리였다.

▲모태신앙인 나는 채플에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과는 다른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느낄 정신적 위압감을 생각하면 나 역시 불편한 마음이 든다. 그것은 종교적 색채가 흐리다고 위로되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 학교에 왔으면서 왜 채플을 거부하느냐’는 답변은 너무도 가혹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명문대라는 이유로 우리대학교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곧 ‘생명이자 진리’로 받아들인다. 설령 그것이 ‘참 진리’라 해도 채플을 강요하는 것은 그 방법이 적절치 못하다. 디킨슨의 말과 같이 ‘진리는 천천히 보지 않으면 눈이 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진리를 찾는 전제에는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자유가 보장된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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