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를 위한 로드무비 '바이브레이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왜 편의점 안을 배회하는 걸까. 그녀는 와인에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왜 독일산 와인은 모두 화이트와인인지’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얼핏 바라본 잡지에선 어떤 여자가 튀어나와 말을 건넨다. 지독스럽게 고독해 보이는 여자. 카메라는 그녀에게서 페티시즘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해서 한 여자를 담아낸다. 미동도 없어 보이는 표정이지만, 그 표정에는 이미 왠지 모를 우울함이 묻어난다.

한 남자가 그녀가 있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은 그를 ‘낚시꾼’이라 명명하며 눈길을 그에게 고정시킨다.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남자. 그녀의 눈빛을 느꼈는지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건드리며 지나가고 이 몸동작은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그녀의 욕망을 밖으로 이끌어내고 만다.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 도발적인 대사가 적힌 자막이 스크린을 뒤덮고 이제 그녀의 발길은 그를 향하고 있다. 트럭 운전사인 남자, 오카베 다카토시와 르포라이터 하야카와 레이의 우연한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새 여자는 남자의 트럭에 올라탔다. 그들은 짧은 얘기를 나눠보지만 여자는 뭔가 못 마땅한 표정이다. “만지고 싶어.”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속삭인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섹스를 한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한 채 몸을 느끼며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이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정으로 이어진다. 트럭에 몸을 싣고 달리는 두 사람.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고 과거를 물어가며 흔해 빠진 이야기들로 대화를 채워나간다. 음식물을 먹으면 다 토해내던 여자는 이제 구토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자신이 갖고 있던 상처와 아픔을 그 남자와 함께 하면서 하나씩 지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이제 여자는 그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도 뭔가 불안함을 다 떨치지 못하고 있다. 무선통신을 하던 중 들려오는 소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예전의 아픈 기억들을 하나씩 재생시켜나간다. 친구와 전화하는 도중 전화를 끊기 싫어서 부엌에서 오줌을 싸버리는 회상 장면은 그녀가 얼마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로드무비. 영화 ‘바이브레이터’를 가장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는 문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로 영화를 수식하기엔 ‘바이브레이터’가 주는 여운의 울림은 길고 찡하기만 하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장면을 꼽으라면 남자가 여자에게 운전 연습을 시켜주는 씬(scene)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오버랩되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다. ‘사마리아’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운전을 가르쳐주듯 ‘바이브레이터’에서도 남자가 여자에게 운전을 가르쳐준다. 아버지와 남자 모두 그저 친절하기만 한 '수컷'들이다. ‘사마리아’에서의 운전 연습 장면과 바퀴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는 페인트칠한 돌맹이들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얘기해준다면 ‘바이브레이터’에서는 ‘내용 있는 아름다움’으로 바뀐다. 여자는 트럭을 운전하면서 인생이 두렵지 않음을 깨닫고 이제는 더 이상 아픔을 떠올리지 않는다.

짧은 여정을 마친 두 사람. 이제 다시 처음 그 장소로 돌아온다. 그녀는 트럭에서 내리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 편의점 안의 그녀. 여자는 다시 와인을 고르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잡지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외로움에 치를 떨며 남자를 찾아 헤매던 예전 모습은 이제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그녀가 우리 앞에 서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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