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사람 - 서울대 김민수 교수

김민수 교수가 지난 3일 복직됐다. 지난 1998년 재임용에서 탈락한 지 6년여만의 일이다. 복직 결정이 있기 전날이었던 지난 2일 서울대학교 본부 앞에서 5백20일째 천막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김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쌀쌀한 날씨 속에 홀로 꿋꿋이 천막을 지키고 있던 김교수는 학교 당국에 대한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지난 2월 28일 고등법원의 복직 판결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은 지난 1일 인사위원회에서 복직안을 부결하는 등 ‘물타기’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지난 6년 동안 법원 판결만 기다려 왔고 이제 복직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도 왜 학교측은 복직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는다.

김교수를 둘러싼 갈등의 시작은 그가 서울대 개교기념 심포지엄 논문에서 장우성 등 서울대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했던 지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교수는 학장실에 불려가 4시간 동안 문제 내용의 삭제를 강요받았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갈등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친일미술계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김교수는 그러나 양심을 지킨 대가로 2년 후인 1998년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재임용 탈락 사유는 이번 법원 판결에서도 드러났듯이 석연치 않다. 당시 김교수는 재임용심사기준의 4배에 달하는 논문을 제출했다. 또한 집단사표를 제출하며 미대 교수들이 제기한 표절 문제는 여러 번의 공청회 등을 통해 사실무근으로 드러난 바 있다. 김교수는 “표절에 대해서는 대학본부에 직접 물어보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대학사회의 자정 능력을 통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될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한 남자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비폭력 저항 수단’이자 ‘절규에 가까운 표현’으로 지난 2003년 9월 29일부터 본부 앞 천막 농성을 선택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살인적인 추위와 학교 본부측의 끊임없는 방해, 그리고 계속되는 재판 과정은 숱한 어려움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교수가 그동안 투쟁만 한 것은 아니다. 5권의 저서와 20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3학기 동안 빈 강의실을 빌려 무학점 강의를 강행해왔다. “정식 강의가 아니었기에 강의실 대여 등이 어려웠다”고 김교수는 회상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학점 강의는 매회 수십여명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강의를 수강했던 ‘김민수교수복직학생대책위원회’ 위원장 금기원씨(서울대, 서양미술·석사3학기) 역시 “내가 들어본 최고의 강의였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3일 서울대 인사위원회는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안을 가결했다. 이로써 김교수는 이번 학기에 복직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기자와 통화한 김교수는 “당연한 일이 지금에야 이뤄졌다”며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김민수 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대라는 교육기관의 위상 제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대학의 민주화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 서울대의 이번 복직 결정은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내린 측면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복직 후에도 보수적인 대학환경을 개혁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는 김교수는 이번 학기 ‘디자인과 생활’, ‘디자인사’ 두과목을 강의할 예정이다. 서울대 기정석군(사회·04)은 “돌아온 김교수의 강의가 기대된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꼭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6년의 투쟁은 힘겨웠다. 그 긴 투쟁의 결실은 김교수 개인의 복직만이 아니라 부조리한 상아탑의 개혁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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