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을 떠나는 언더우드가

지난 2004년 11월 26일 H.G.언더우드 박사(한국명 원두우, 아래 원두우)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가 부인 원은혜 여사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원두우 박사가 한국에 발을 디딘지 1백19년만 이었다.

원한광 박사는 “우리 언더우드 가족이 한국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다”며, “무엇보다 증조할아버지가 처음에 기대하셨던 기독교 전파, 의료 사업, 현대식 교육, 그리고 한국의 경제개발이 모두 이뤄졌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에 집을 두고 미국에 오갔듯이 앞으로도 미국에 집을 두고 한국에 오갈 것”이라며, 한국과의 인연은 계속될 것임을 강조했다.(지난 2004년 11월 29일자)

원두우 박사와 한국의 인연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시작됐다.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디딘 그는 한국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또한 한국을 이끌어나갈 한국인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해 한국근대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언더우드가와 한국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두우 박사의 아들 원한경 박사는 부친의 뜻을 이어 연희전문학교의 3대 교장으로 취임해 국학 연구의 기반을 다졌고,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 제암리 교회 사건을 국외에 알리기도 했다.

원두우 박사의 손자이자 “내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원일한 박사는 한국전쟁 시 군에 재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고, 휴전협정 시에는 UN군측 수석통역관을 맡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대 교수, 우리대학교 총장서리 및 상임이사로 여생을 연세와 함께 보냈다. 원한광 박사는 한미교육위원단장으로 한미간 학문 및 전문지식의 교류사업을 지원하는 등 양국 간의 우호증진에 공헌했다. 또한 국제교육교류부의 창설을 주도하고 국내 최초로 신설된 국제학대학원의 초대 교학과장과 국제학대학원장을 역임해 우리대학교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우리대학교는 언더우드가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지난 2000년 ‘언더우드 기념사업회’를 조직했다. ‘언더우드 기념사업회’는 원한경 박사가 1920년대부터 살던 연희동 사택을 ‘언더우드 기념관’으로 조성하고, 지난 2001년부터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를 대상으로 ‘언더우드 선교상’을 시상해왔다. 또한 우리대학교는 오는 2006년 전 과정이 영어로 진행되고 기존 학문 전공분야와 연계성이 강화된 독립 영어교육 단과대학을 설립하며, 언더우드가와의 소중한 인연을 기리기 위해 ‘언더우드 국제학부(Underwoo d International College)’라고 명명했다.(11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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