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기만 했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별도장을 받으며 숙제로 쓴 일기장이 책상 위에 한 권, 두 권 쌓여가는 것을 뿌듯하게 느꼈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 쯤 있을 것이다. 일기 뿐만 아니라 소소한 메모들과 날적이 그리고 요즘의 블로그까지, 인간은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우리의 인생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의 고전적 화두-나를 찾아가는 과정

인간의 본능에 가장 가까운 기록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이다. 심리학자 페스틴저(L.Festinger)는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자기상을 스스로 묘사하고, 그 상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는 심리로 인해 인간이 기록을 한다는 말이다. 계명대 교육학과 박아청 교수는 “인간은 원초적으로 자기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상태와 특징을 나름대로 파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즉,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바로 자기기록을 낳은 것이다.

'자기 발견을 위한 자서전 쓰기'의 저자인 소설가 이남희씨는 “자신을 기록하는 글은 반성적인 성격 때문에 기록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기 자신이 보이게 된다”고 말했다. 일상의 사소한 일과 자기 생각을 쓰는 과정은 곧 기록으로써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록은 인간의 자기 형성 욕망을 충족시켜 기쁨을 주고, 그 기쁨은 또다시 인간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는 순환 고리를 만들어 낸다.

한편,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표현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잊고 싶지 않지만 결국 잊어버리게 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유한한 인간 존재를 영원히 남기기 위해 자기기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광희 교수(문과대·인지공학심리학)는 “기록은 인간 기억의 한계점을 보완해주는 일종의 외부 기억장치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기록으로 대체함으로써 자기 의미를 찾고, 보존하려한다. 그러나 한교수는 “자신이 기록했다는 사실 만큼은 기억해야 그러한 기록의 의미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한 자기기록은 ‘자기대화’ 수단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지만 말할 상대는 없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아의 억눌림’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이는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자아의 억눌림을 언어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남성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밀 일기장은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내면의 깊숙한 욕망과 걱정거리들을 기록을 통해 다소나마 떨쳐버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연세상담센터 이경아 상담원은 “단순히 자신만의 기록으로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보다 서로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 자기기록에의 심취는 자칫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면의 은밀함을 벗어나다

혼자만의 기록이 인터넷의 열린 공간으로 그 장이 확장되면서, 기록하는 심리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인터넷 기록 공간의 대표적인 예로 블로그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 자기 기록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답글이 달리기도 한다. 따라서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한 자신을 담아냈던 것과는 달리, 타인을 눈을 의식해 보여주고 싶은 나를 기록하는 자기연출의 측면이 부가된다. 인간행동연구소 장근영 연구원은 “자기 기록의 조회수를 확인하고 신경쓰는 것은 상상의 청중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청소년기 자기중심성’의 연속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기록할때, 많은 이들이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인상을 다듬는다.

그러나 자기연출의 측면이 있다고 해서 자기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윈(Wyne)과 카츠(Kats)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 인터넷 매체는 자신의 고정적인 특성을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블로그 게시판이 다양한 카테고리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양한 측면에서 표현하려고 하는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블로그는 자기기록을 할 수 있는 큰 틀은 정형화시켜 놓아 타자화된 자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추억 그 이상의 가치

자기 기록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며, 끝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더욱 발전된 나를 만날 수 있게 한다. 또한 추상적인 삶의 단상들을 구체적으로 유형화시키는 과정을 제공한다. 정종훈 교수(신과대·기독교윤리)는 자기 기록의 가치에 대해 “젊었을 적에는 기록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봐 부끄러웠던 일, 자랑스러웠던 일 모두 매듭짓고,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기를 썼던 그 순간 만큼은 거울에 비춘 것 같은 객관화된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기록은 과거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것을 넘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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