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성년을 갓 넘긴 주제에 이런 말을 내뱉긴 우습지만, 기자는 이바닥(?)에서는 꽤 잔뼈가 굵은 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웹진 기자생활을 하며 기사를 써왔으니까. 편집국에 앉아 기사를 편집하다가 문득 그 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기자는 인기절정이던 모 댄스그룹의 해체를 둘러싼 팬들과 기획사 간의 갈등을 다루는 기사를 맡았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올리고 나서 며칠간 그 그룹 팬들의 거센 항의메일을 받아야만 했다. 기자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팬들의 가수 사랑을 단지 기획사 농간에 놀아난 것으로 매도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 때 기자는 전후정황을 명확히 따져가며 기사를 쓴 게 아니라, 대충 정리한 생각에 억지로 사건을 짜맞췄을 뿐이었다.

▲‘쉽게 씌어진 글’은 종종 글을 쓴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사이버 네트워크의 확대로 매체에 대한 접근도가 높아진 오늘날 이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전달자와 수용자의 구분 없이 누구나 텍스트 생산의 주체가 되고 있지만, 그에 걸맞는 ‘텍스트의 룰’은 제대로 각인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대리수능 파문에 대한 많은 글들도 이런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룰’에 무지한 기자들은 이 사건이 정작 보여주는 교육체계의 모순보다는 부정행위자의 신변잡기나 컨닝비법 따위에 몰두해 수용자들의 인식체계를 왜곡했고, 이들은 다시 ‘룰’에서 벗어난 추측난무식 텍스트를 유포해 당사자들의 인격을 짓뭉개버렸다. 이런 일이 단지 이 경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명제다.

▲젊은 지성의 영원한 상징 윤동주는 그의 시 「쉽게 씌어진 시」에서 자신이 쓴 글에 쉽게 만족하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책망한다. 좋은 글, 진실한 가치를 담은 글을 써내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우리들은 그의 고결한 마음속에서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까. 적어도 공중(公衆)앞에 텍스트로 접근하는 저널리스트이기를 희망하는 이들이라면 조금은 달라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쉽게 글을 취급하는 사회적 파고에 휩쓸려 요즘엔 기자란 이들조차도 단지 자기만족을 위한 글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널의 이름을 내건 상호는 난무하나 정작 제대로 된 저널을 맛볼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불행히도 춘추 역시 예외가 아닌 듯싶다. 공식언론이라는 보기 좋은 위상에 자족했을 뿐, 정작 세상을 향해 거칠게 파고들거나, 적어도 진실한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부끄럽다. 적당히 취재해서 적당히 씌어진 ‘룰’을 깨뜨린 글은 진실을 비껴가거나 독자를 언짢게 한 일이 적지 않았다.

▲‘펜 끝의 권력으로 세상을 깨뜨리다.’ 언론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우는 신조처럼 펜 끝을 떠난 글이 퍼지며 만들어내는 권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쉽게 씌어진 글’로 만들어진 언론은 공기(公器)가 아니라 독자를 속이고 세상을 상처입히는 흉기(凶器)가 될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뿌듯하면서도 두려운 일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윤동주의 시처럼 자기 앞에 진실로 부끄럽지 않은 나의 얼굴, 나의 글을 이 시대의 소위 ‘저널리스트’들이 간직하길 바라며 스스로도 같은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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