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국학’, 발해의 ‘주자감’, 조선의 ‘성균관’, 그리고 오늘날의 ‘대학’.

시대와 지역에 따라 지칭하는 이름은 다르지만, 전문적인 지식전달과 발전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은 항상 존재해왔다. “언제 어디에서도 대학의 기본적 구조와 성격은 비슷하다”는 황금중 교수(교과대·한국교육사)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의 대학들은 인재를 뽑아 교육시켜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해 왔다는 점에서 그 맥락이 같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 사회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조금씩 변화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전신)이 최초로 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된 이후 본격적인 대학교육이 시작됐다. 그 후 지난 1970년대 초반까지 대학은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당시만 해도 오랜 전쟁과 식민지의 잔재가 남아 경제회복과 사회발전이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기에 대학은 커녕 학습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대학은 학습여건이 되는 소수의 학생들만 수용해 교육기회를 부여했으며, 이러한 대학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엘리트 의식을 느끼며 사회에서 몇 안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며 대학의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역할은 눈에 띄게 줄었다. 유석춘 교수(사회대·발전사회학)는 “베이비붐 이후의 세대가 대학진학연령으로 성장해 대학을 진학하는 인구는 줄어든 반면,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대학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대학과 대학생의 희소성은 줄었다”며 그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이 시기에는 대학에서의 학생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대학이 ‘사회 참여 주도’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황교수는 매일같이 ‘학원사찰’이 진행됐던 당시 상황에 대해 “학생들은 대학에 와서야 잘못된 역사의 진실을 알고, 배신감과 함께 자신이 정의를 밝힐 수 있다는 희열을 느끼며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대학과 대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은 사회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996년 한총련 사태로 우리대학교 종합관이 불타는 일까지 벌어지며 절정을 이뤘던 학생운동은 1990년대 말 대학가에 불어든 개인주의의 바람에 급속히 쇠퇴했다. 대학생 절대수의 증가로 사회에서 더 이상 대학생이 특별한 존재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자, 학생들의 사회참여는 소극적으로 변해갔고 대신 그들의 관심사는 자기자신으로 돌려졌다. 유교수는 “최근 학부제의 도입으로 선후배관계가 무너지면서 대학 내 집단을 이끌 수 있는 기제가 사라진 것 역시 개인주의의 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대학은 예전처럼 엘리트 혹은 사회참여자의 역할을 대변하기 보다는 각 개인의 ‘사회진출의 전단계’로서 존재한다. 특히 지난 1997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취업과 같은 실용주의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취업률이 높은 학과의 인기현상, 기초학문의 위기 등이 팽배한 현 대학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는 변화했고, 변화한 사회는 대학생들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속한 대학의 성격과 구성을 바꿨기에, 대학은 때론 지식인의 집단으로서, 때론 사회를 바로잡는 비판자와 행동자로서, 때론 개인의 미래를 위한 장으로 존재해왔다. 또다시 변화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이제 대학은 어떤 의미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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