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한다. 각종 위기론이 나돌아 사람들의 주머니뿐 아니라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각 경제주체들은 나름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여러 갈래로 나뉜 목소리들은 하나로 모아질 줄을 모르고, 특히 하반기 노사정 관계는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제는 역설적 으로, 경제 위기를 타개할 방안의 하나로 제시됐던 ‘사회적 합의’가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 그 의미와 한계

‘사회적 합의’는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경제 주체들이 합의를 통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보장받을 것은 보장받음으로써 공동의 이익을 창출해내자고 하는, 간단하지만 실현되기는 쉽지 않은 논리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 서구의 선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미 그 효력을 발휘한 바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IMF 사태 이후 출범한 노사정위원회가 사회적 합의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연구원은 “노동자, 사용자, 정부라는 경제주체 중 어느 한쪽만의 힘으로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데서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제주체들이 그 필요성엔 공감하고 있지만, 그 방법 및 내용에 있어 입장차가 매우 크다. 또한 노동계 일각에서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기도 한다.
사회적 합의 자체에 반대하는 노동계 일부는, 정부와 경영계가 타협하려는 최소한의 의사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비정규직 개악, 공무원 노동조합 탄압 등에서 보듯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마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타협을 말하지만 노동자들이 양보할 수 있는 것도, 사용자 측에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사회진보연대 정영섭씨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노동자의힘 원영숙 기관지연장은 서구의 사회적 합의 모델과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배경을 대조해 사회적 합의의 허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서구의 경우 2차 대전 전후 호황 속에서 노사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과 성숙된 노동환경이 조성돼 사회적 합의가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경제적 불황기이므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양보할 만한 물질적 토대가 없고, 세계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자들의 힘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어 오히려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양보만 하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노사정위원회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한편 노동계 다수의 입장은 사회적 합의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되, 현재의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방식에는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민주노동당 이상훈 정책연구원은 “종래와 같이 정부가 상정한 안건을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일회적 방식으로는 경제주체들간의 신뢰를 구축할 수 없고 ‘합의를 위한 합의 테이블’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노사정위원회가 대통령 자문 기구일 뿐이므로 위원회를 통해 도출된 협의안은 강제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는 노동계와 경영계 양측 모두 합의 사항을 강제할 수 있을 만한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보다 본질적인 한계와도 직결돼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우리나라의 노조조직율이 아직 낮고, 경영자에 대해 현실적 구속력을 갖는 조직체도 전무하다는 것이 이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법적·본질적 한계로 인해 사회적 합의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조차 “사회적 교섭은 필요하지만 현재와 같은 노사정위원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노사정위원회 복귀가 좌절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것이 교섭구조의 다각화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교섭은 기업별 교섭이 중심이 되고 있어, 개별 노조의 이기주의나 노동자간 격차 심화와 같은 문제점이 나타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전국 단위나 산별 교섭에서는 정부의 참여 하에  복지, 환경 등 공익적·대중적 사안에 대해 원칙적 차원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기업별·지역별 단위에서는 노사 자율주의에 입각해 교섭이 이뤄져야 한다. 이와 같은 다각화를 통해 대표성 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중앙의 결정 내용과 현장과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조합의 내적 민주주의가 확보돼야 하며, 노사정위원회의 사회적·법적 지위와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그 실효성도 높여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여겨진 네덜란드의 경우,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자제를 약속한 대신 경영계는 노동자들에게 고용창출 및 보장을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노사 자율시스템이 강화됐고, 노동기본권이 확장됐다. 이정책연구원은 “개별 국가의 상황이 다르므로 섣불리 다른 나라 모델의 도입을 검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면서도, “원칙적 차원에서 노사 자율주의에 기본을 두고 노사 교섭방식이 만들어져야 하며 노동기본권 보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합의의 걸림돌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이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은 대기업 노조, 정규직 중심이다. 이들이 과연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내놓으면서까지 공적 이득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합의를 하는 것이 오히려 ‘노-노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와 같은 ‘노―노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노동조합 내부 갈등은 노동운동이 극복해야 할 큰 과제다.
또한 경영계는 노사관계와 사회적 합의에 대한 기본적 인식부터 전혀 다르다. 그들은 노조의 전투적 파업이 투자의 불안정성을 높여 현재와 같은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하면서 노사간 대화의 의의를 경제 활동의 안정성 확보에서 찾는다. “노사 대타협에서 줄 것이 없다. 우리가 줄 것은 기업을 폐쇄하지 않음으로써 고용을 유지하는 것뿐이다”라는 한국경영자총협회 최재황 정책본부장의 말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현재의 경제 위기 등을 생각해 양보하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무리한 규제를 통해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 자본의 이중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인식과 기대를 갖고 있으므로 노사 대타협이 이뤄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현재 노사정위원회에서 다뤄지는 문제들 대부분이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에 대해 지나치게 큰 기대를 갖지는 말아야 한다”는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 연구원의 말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이제는 합의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넘어 합의를 ‘만들어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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