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부활절, 작은 배 한척이 제물포항으로 들어온다. 배에는 성경을 품에 안고 한손을 반갑게 흔들며 서있는 파란 눈의 두 선교사가 있다. 이들은 한국 땅에 누가 먼저 발을 딛는가를 놓고 서로 눈치를 본다.


H.G.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아래 원두우)와 H.G.아펜젤러의 제물포 상륙을 두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두 선교사는 소망의 땅에 먼저 발을 딛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다가 동시에 발을 디뎠다고도 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경쟁적으로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도 한다.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온 이들의 기쁨은 그만큼 남달랐다.

파란 눈의 선교사

원두우 박사가 처음에 가려고 했던 선교지는 인도였다. 그러나 1882년 겨울, 한 편의 논문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이 문호를 개방한다는 사실과 1천 2백만이나 되는 인구에 복음을 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긴 논문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고, 모두들 한국에 가는 것이 시기상조란 말만 되풀이했다. 바로 그때 원두우 박사는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1년간의 고민 끝에 인도에서 한국으로 선교지를 바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 땅에 발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의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 기도문 중)

원두우 박사는 미국 북장로교회에 한국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던 이수정씨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이후 정자나 나무 밑에 앉아 지나가는 한국 사람과 대화식으로 선교하는 소위 ‘한길 선교’를 시작했다. 이것은 호기심 많은 한국 사람의 성품을 고려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사랑방 선교’를 했는데, 이에 대해 원두우 박사가 후배 선교사들에게 해준 이야기가 특이하다. 사랑방 안에서 선교할 때는 선교사가 주인의 갓이 걸려있는 벽의 반대편에 앉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 위치가 서열이 가장 낮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한국인의 특성과 한국 문화에 맞는 선교를 하려고 애썼다.


이후 1887년 원두우 박사는 정동에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새문안교회는 장로교회였지만 원두우 박사는 교파 통합의 정신을 추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교파 확장으로 인한 분열, 갈등에 회의를 느낀 원두우 박사는 교회나 학교 설립에 있어 교파 통합의 의지를 보였다. 장로회신학대 신학과 김인수 교수는 “원두우 박사는 새문안교회 설립 후 다시 교파 없는 하나의 개신교회 설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초교파적 교회설립에는 실패했을지라도 대학 설립 등 다른 선교 활동에는 그 뜻을 이뤘다. 현재 우리대학교가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원두우 박사의 후반기 활동은 주로 교육 활동이었다. 그는 대학설립의 꿈을 가지고, 형인 J.T.언더우드의 지원으로 건물을 짓고 대학을 세웠다. 그 건물과 대학이 지금의 언더우드관, 연희전문학교다.

국학의 중심 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는 서양인이 세운 학교였지만 단순히 서양의 문물을 가르치는 대학이 아니었다. 국학을 가장 먼저, 깊이 연구한 대학이었다. 이에 대해 서정민 교수(신과대·교회사)는 “연희전문학교의 설립 정신이 한국을 이끌어나갈 한국인 지도자를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원두우 박사는 국학에 대한 중요성을 우리보다 먼저 인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원두우 박사는 한국 문화 중에서도 한글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발간했을 뿐 아니라 찬송가를 만들 때도 ‘어떻게 하면 한국어로 가장 아름답게 부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국학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원두우 박사의 아들 원한경 박사는 연희전문학교의 3대 교장으로 취임해 정인보·김윤경·최현배·백낙준·백남운·홍이섭으로 이어지는 국학 인맥의 기반을 다졌다. 서교수는 “일제의 국학연구 탄압책이었던 조선어학회 사건의 중심에도 연희전문학교가 있었다”며, “연희전문학교는 국학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고 말했다. 누군가 사학자 홍이섭 선생에게 “연세대학교의 1백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외솔 최현배 선생이 『우리말본좭을 만든 곳”이라고 답했을 정도로 국학은 연희전문학교, 나아가 우리대학교의 상징이었다.

신촌 원씨 언더우드가(家)

원한경 박사는 3·1운동, 제암리 교회 사건을 국외에 알리는 등 한국사랑을 보이다 한국전쟁 중 사망했다. 원두우 박사의 손자 원일한 박사는 한국전쟁시 군에 재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고, 휴전협정시에는 UN군측 수석통역관을 맡았다. 원일한 박사는 당시 사투리까지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했다. 휴정협정 때도 “원 투 쓰리” 해야 할 것을 “하나 둘 셋”이라고 말해 주위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고, 평소에도 “글쎄”라는 말을 자주 썼다. 생전에 “내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그는 사람들에게 ‘언’과 ‘원’이 비슷하다며, “나는 신촌 원씨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원두우 박사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우리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제교육교류부의 창설을 주도했다.
언더우드가의 여성들도 많은 역할들을 수행했다. 원두우 박사의 부인 릴리아스 호튼 박사는 한국에 들어온 첫 서양 여의사다. 명성황후의 시의였을 뿐 아니라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여성계몽 운동에도 앞장섰다. 원한광 박사는 “여성도 남성처럼 사회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 여성들에게 일깨워준 인물”이라고 회고했다. 원한경 박사의 부인 에델 반 와그너 여사는 서울외국인학교의 교사였으며, ‘에델 언더우드 소녀 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원일한 박사의 부인 조운 데이비슨 여사도 서울외국인학교의 교사였다. 그녀는 우리대학교 영문과 교수도 지냈으며, 특히 지금도 출판되고 있는 포켓 사전을 만들었다. 원한광 박사의 부인 낸시 언더우드 여사(한국명 원은혜)도 우리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지난 18년 동안 1백40여개의 강의를 맡았으며, 자신이 가르친 3천여명 학생들의 사진과 파일을 모두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애착이 크다. 하지만 원한광 박사는 “언더우드 여성들 또한 일생을 헌신했지만, 정작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적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한국을 떠나는 언더우드가. 서교수는 “언더우드가가 지금까지 일궈놓은 것은 연세가 세계로 나가기 위한 전단계”라고 말한다. 언더우드는 국학과 같은 우리나라의 보물을 발견하고, 한국인이 국가를 이끌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한 후원자였다. 이제 언더우드의 정신을 이어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는 연세의 과제는 우리의 몫이다.


 /권혜진 기자
 hye-ji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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