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대선이 조지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의 승리로 끝이 났다. 미국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이라크전쟁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했던 기대는 안타깝게도 충족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라크에서의 살육과 갈등을 보면서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평화적 질서는 과연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게 됐다.

이쯤에서 생각하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구교와 신교 간의 불관용에 대항한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관용론』이다. 볼테르는 이 책에서 1726년에 발생한 ‘칼라스 사건’을 다루면서, 종교적 편견에 의해 조작된 칼라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자 동서양의 역사와 성서, 강론, 도덕론을 뒤져 불관용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찾는다.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감각과 재치로써 시대와 인간의 오류를 고발했다.

결국 이러한 볼테르의 노력에 힘입어 3년이 지난 1765년,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고 볼테르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 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옹호한 관용은 그의 사후에도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프랑스를 보자. 프랑스대혁명 이후 이어진 대규모의 반복된 숙청 작업과 그 뒤에 이어진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제국주의의 범세계적 식민지 착취, 프랑스의 몰락을 재촉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관용’의 맥락에서 내려온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 역시 이러한 불관용의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이 지배하고 승복의 문화가 부재한 것은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과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우리에게 자연이 이렇게 말한다고 알려 줬다.

“나는 당신들 각자의 가슴에 서로를 도와 삶을 견뎌 나갈 수 있도록 동정심의 싹을 심어 주었소. 이 동정심의 싹이야말로 신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오. 그리고 당신네들의 가련할수 밖에 없는 당파적 논쟁의 격양된 고함소리로 자연의 목소리를 지우지 마시오.”

따라서 우리가 서로의 차이로 인해 갈등하고 대립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 된다. 그가 뿌렸던 관용의 작은 씨앗이 조만간 커다란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이 책에서 그가 신에게 올린 기도 한 구절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손조광(불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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