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성조기가 불타고, 또 다른 쪽에서는 인공기가 불탄다. 집창촌 여성은 거리에 눕고, 식당주인은 솥을 내던진다. 영문 모르고 시위에 동원된 폐계(廢鷄)는 양계장이 아닌 백주대로상에서 목 비틀리고, 파업 중인 엄마 손잡고 시위 앞줄에 앉아있는 아이도 영문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이 혼란한 시국에 하다못해 공무원까지 일조를 하겠단다. 온 나라가 시위하느라 날밤을 새는 일종의 총체적인 민란(民亂)의 형국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눈부신 산업화와 명예로운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의 기강이 왜 이 지경이 됐는가. 나라의 기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의 체면이고 품격이다. 품격 없는 국가가 내리는 영(令)이 지켜질 리가 없다. 국가의 영은 공권력의 행사가 아닌 존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의 국품(國品)이 요모양 요꼴이 됐는가. 그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국사(國事)를 책임진 지도자들의 몰상식과 천박함에서 찾아야 한다. “찌그러진 투구” 운운하는 대통령의 품위없는 비유나 그렇다고 해외순방 중인 대통령을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고 몰아 부치는 야당의원의 막말이나, 또 “헌재쿠데타”라는 언어도단을 거리낌 없이 떠드는 여당의원의 무식한 치기나, 그 어디를 보아도 이런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품격이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이리도 비천하게 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의 폭력을 통해서 분열을 조장하면 할수록 정치적인 이득이 있다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그래왔다. 지나간 시대의 지역감정 발언부터 최근의 노인폄하 발언에 이르기까지 피아를 가르고 상대방을 자극해 내 편을 결속시키는 꼼수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정치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작금 분열상의 이차적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들의 계산된 언어폭력에 일희일비하고 결국에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편 가르기를 해온 우리 모두가 국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 민란(民亂)의 형국을 보면 우리도 저들보다 크게 나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참여라는 대의명분을 빌어 밥그릇싸움과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일삼기는 우리 모두가 공분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할 건 없다. 산업화의 결과가 천민자본주의였듯이, 이대로 가면 민주화의 결과도 천민민주주의가 될까 우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부터 바꿀 것인가.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 특히 저들 지도자들이 먼저 변할 가능성이 난망하기에 더욱 그렇다. 무엇을 할 것인가. 저들의 분열꼼수에 말려들면 안된다. 저들이 분열의 미분을 들고 나올 때, 우리 모두는 적분의 정치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참여일 것이다.

“저기에 적이 있다”고 선동하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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