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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번역에 대한 평가를 높이자

우리는 세계가 하나인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공간적으로 하나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하나다.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같은 시대를 사는 지구촌의 공동주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세계가 하나인 시대이니 세계화라는 구호는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무엇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 되는가?

번역의 중요성

세계화의 방향은 대체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단일문화로의 획일화를 통한 세계화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조화와 이해를 통한 세계화다. 오늘날 미국 중심의 획일화를 세계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이것이 바람직한 세계화는 아니다. 세계의 각 문화는 오랜 역사를 통해 집적된 인간문화의 자산이다. 지금 어떤 한 문화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서 그 문화만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다 많은 나라의 폭넓은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폭을 넓혀야 된다. 미국의 문화는 물론, 유럽의 문화, 남미의 문화, 이슬람의 문화, 인도의 문화, 중국의 문화, 일본과 동아시아의 문화 등 모든 문화가 다 중요하다.

우리 밖의 세계 각국의 문화가 모두 중요하듯이 우리자신의 문화 역시 중요하다. 우리는 그렇게 넓지 않은 국토에서 수만 년의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왔다. 삼천리 강산 어디를 가도 선조들의 문화의 흔적이 쌓여있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의 머리에는 우리의 문화에 대한 것이 얼마나 축적돼 있는가? 우리의 문화는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글을 쓸 경우 우리 선조가 한 말을 인용하려고 하면, 한 구절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해방 이후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우리의 머리와 삶은 서구적인 것으로 변해버렸다. 1백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의 문화는 거의가 다 한자로 기록됐다. 선조들의 삶의 지혜에 접근하려면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민족은 학문을 사랑해 엄청나게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서울대학교에 있는 규장각과 각 대학의 한적실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보물들이 후손들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연세대학교 한적실에도 10만권의 책에 달하는 장서가 쌓여 있으니 이것은 우리의 보물임은 물론 국가와 인류문화의 보물이다. 그러나 이것을 언제 어떻게 우리의 피와 살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보면 번역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우리나라 밖의 문화에 대한 번역이라는 의미이며, 둘째는 한문으로 기록된 선조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번역이라는 의미다. 전자의 의미든 후자의 의미든 번역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다고 외국문화의 번역은 어렵고 우리 문화유산의 번역은 쉬운 상황은 아닌 듯하다. 외국의 것은 외국에서 연구가 진행돼 많은 의미가 밝혀져 있지만, 우리문화유산의 경우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번역의 어려움과 국내의 번역 경시 풍조

번역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언어와 사상은 그 지역 문화의 총체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각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다. 한 권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내용의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축적을 통한 엄청난 주변 지식을 필요로 한다. 논문의 경우에도 물론 축적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논문은 자신이 읽은 자료 가운데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입장에 맞는 내용만 취사선택해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의 경우에는 이해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건너뛸 수 없다. 그러므로 한 권의 텍스트를 바르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학문적 기초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번역을 소홀히 대하는 풍조가 생긴지는 오래됐다. 번역은 생활이 어려운 대학원생이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하는 잡일처럼 취급됐던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됐을까? 우리 학문의 일본에 대한 의존이 커다란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생활한 학자들은 누구나 일본어를 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의 번역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서양언어에 대한 번역어의 대부분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정해진 개념들이다. 일본어 번역본을 그대로 옮기면 번역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아는 사람에게 서양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독자적으로 연구해서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은 쉬운 것이며 학문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식이 생기게 됐다.

설익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인용해 짜깁기식의 글을 쓰는 것보다 한 권의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으며, 번역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중국의 사상사는 경전 해석의 역사였다. 13경이라는 텍스트는 일정하지만, 텍스트를 이해하는 입장은 훈고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에 따라 바뀌지 않았던가? 기독교의 신구약성서가 최근의 표준새번역판으로 확정되기까지에는 몇 세기가 걸렸는가? 그렇다고 13경과 성경의 번역작업이 완료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과거의 학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꼼꼼히 추적하는 가운데, 오늘날 새롭게 이해될 여지는 없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학문에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한 편의 논문과 비견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다.

번역한 연구물에 석사학위를 수여해야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회에서나 대학에서 번역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일으켜야 되겠지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석사과정의 학위논문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한 권의 텍스트를 선택해, 번역의 역사와 연구사를 밝히며 번역한 연구물에는 석사학위가 수여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번역에도 번역의 역사성이 반영돼야 기존의 번역에 대한 비판이 이뤄지게 되고, 기존 번역에 대한 비판이 이뤄져야 함부로 번역하는 문화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년에 수천 명의 석사가 배출될 경우 얼마나 많은 동서양의 고전에 대한 학술적 번역물이 나올 수 있겠는가? 석사논문이 아무도 읽지 않는 공해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석사학위제도의 전환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사학위의 경우에는 석사학위 제도의 변화가 정착된 다음 고려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연세대학교는 태생적으로 세계화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대학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서양의 학자가 세운 학교가 연세대학교다. ‘延’자는 동양과 한국을 상징하며 ‘世(SE)’는 서양을 상징한다. 연세라는 이름 자체가 한국과 서양의 만남을 상징한다. 세계의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문화의 현대적 번역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하고, 아울러 서양의 학문을 번역해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통일을 이뤄 세계사의 진행을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선행돼야 하는 것이 번역의 중시다. 연세대학교의 대학출판물 가운데 고전번역물이 얼마나 포함돼 있으며, 국학의 발전을 추진해온 국학연구원의 출판물 가운데는 또 얼마나 포함돼 있는지 궁금하다.

/ 철학과 이광호 교수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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