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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그려낸 그녀의 독백, 무대를 가득 채운 울림이 되어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배우 서주희 인터뷰
  • 양소은 기자
  • 승인 2004.11.22 00:00
  • 호수 1506
  • 댓글 0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무대라는 액자에서 막 걸어나온 그녀는 힘든 표정을 잠시 접어둔 채 기자의 질문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얼굴에 걸려있던 굵은 땀방울과 나지막이 귓가를 울리는 그녀의 음성은 함께 마주하는 이의 가슴까지 벅차오르게 한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발산하는 엄청난 에너지 때문일까. 관객석 저 끄트머리까지 전달되던 무대 위, 그녀의 열정이 그대로 살갗에 와닿는 기분이다.

배우, 그 아름다운 이름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시원한 웃음이 아름답기만한 ‘그녀’, 배우 서주희. 불과 몇 분전까지 그녀는 무대 위를 휘저으며 관객들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는 언뜻 그 제목만으로 내용이 상상되지 않는다. ‘버자이너(vagina)’가 여성의 질을 뜻하는 영어 단어라는 사실을 안 후에야 비로소 의문이 풀린다. 쉽사리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 이름처럼, 어쩌면 한번도 제대로 들어볼 수 없었던 여성의 성(性)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연극이 바로 『버자이너 모놀로그』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내뱉는 말은 듣는 이를 당황케 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연기와 간절한 목소리는 결국 모두에게 진심을 전달하고야 만다. “처음 이 연극을 시작할 때는 대본에 씌어진 적나라한 단어와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수도 없이 말하다 보니 잠꼬대를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며 유쾌하게 얘기한다. 실제로 두 시간 동안 무대 위를 가득 채우던 그녀는 쉴새 없이 ‘금기어’들을 쏟아냈다. 극이 시작할 무렵, 관객석에 옅게 깔려있던 당황스러움과 어색함도 그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넬 즈음엔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관객과 함께 숨쉬다

그녀는 자신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무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의 사랑 덕분이라고 힘줘 말했다.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도 쉽게 사라져버리는 우리나라에서 “관객들의 꾸준한 사랑과 관심이 없었다면 결코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그녀는 관객과의 교감을 소중히 여기는 배우였다. 또 지난 2001년 초연과 2004년 공연의 가장 큰 차이가 관객들의 태도 변화라고 언급하며, “그동안 감추고만 있던 ‘성’이라는 화두가 4년 사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관객들도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된 것 같다”고 얘기했다. “지난 2001년 까지만 해도 공연 내내 경계하는 태도로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있었지만 이젠 관객들이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며, “이런 관객들이 극을 이끄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덧붙였다.

서주희씨는 그렇게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을 이끌어 낸다. 이는 무대의 주인공은 ‘배우와 관객 모두’라는 그녀의 고집이 만들어낸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숨은 매력이다. 연극을 본 후, 어느 때보다 좋은 태교를 했다고 고마워했던 임신한 여성 관객부터, 어머니 생각이 나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고 털어놓은 한 남성 관객까지…. 자신과 함께하던 수많은 관객들이 연기의 원동력이라는 그녀는 오늘도 새로운 관객들과 함께 가치있는 감동을 나누는 중이다.

서주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원작은 미국 극작가 이브 엔슬러(Eve Ensler)가 2백여명의 여성과 그들의 ‘버자이너’에 대한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다. 수많은 여성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성과 성기에 가해졌던 억압과 비극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을 당당하게 말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연극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70대 노인부터 5살배기 여자아이까지 수없이 많은 ‘여성’과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녀는 무대 위의 배우가 한사람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특히 한 소녀의 성장기를 좇아가며 그 소녀가 경험하는 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은 단연 극의 클라이막스다.

하지만 그런 혼신의 연기 뒤편엔 그녀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서주희씨는 “관객들을 향해 서있지 않을 때, 내가 헉헉대며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무대감독이 제때에 조명을 켜지 못한 적도 있다”며, 연기의 고충을 토로했다. 이처럼 힘든 배우 생활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 자신의 전부를 소진하는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관객들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려 연기한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나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느끼게 하는 모든 과정이 내 삶의 의미가 된 듯하다”는 그녀의 말이 그 증거다.

지난 1992년부터 줄곧 연극 무대에만 서왔던 서씨는 지난 2001년 영화 『꽃섬』에 출연하면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꽃섬』 또한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로, 그녀는 평범한 주부 역을 맡아 차분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한껏 보여줬다. “영화에서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내 목소리를 전달해주지만 연극은 맨 뒤에 앉은 관객에게까지 내 모든 것을 전달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며, “연극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얘기하는 서주희씨. 하지만 “어떤 방법을 통해서건 연기에 담아내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녀는 무대와 스크린 위에 자신만의 색깔을 가득 칠해가는 중이다.

언제나처럼, 무대에서…

‘배우’로서의 진한 향기가 넘쳐 흐르는 서주희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연 언제까지 그녀의 연기를 지켜볼 수 있을지 묻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연기를 하실 건가요?”라는 기자의 멋쩍은 질문에 그녀는 ‘그녀’다운 대답을 들려줬다. “나는 배우로서의 길을 ‘선택’한 적이 없어요. 어느 순간 배우로서 살게 된거죠. 그래서 이 길이 언제 끝날지도 확신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십년이 지난 후에도 무대 위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을 것만 같군요.” 자신의 훗날을 얘기하는 그녀의 꾸밈없는 목소리 위로 조용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짧은 만남을 마치며 그녀는 “말로 표현되는 사실만 전달하려 하지 말고, 사람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깊은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다시 무대라는 액자로 걸어 들어가던 그녀의 뒷모습. 무대 위의 그녀가 채워가는 그림들은 그 진심어린 울림으로 지금도 여전히 모두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양소은 기자  nacl101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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