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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 유머와 활달함의 언어로 뾰족한 칼날을 세우다
  • 윤성훈 기자
  • 승인 2004.11.15 00:00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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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시간이란 하루나 일 주일, 혹은 한 달을 단위로 하여 한 묶음씩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단조로움 속에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

은희경의 단편 「타인에게 말걸기」에서 주인공이 그의 인생에서 원하는 건 오직 ‘단조로움’뿐이다. 실제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단조로움’은 이미 현대인의 동반자가 됐다. 가을을 꾸미고 있는 11월의 단풍과 낙엽만이 현재 우리 일상의 단조로움을 덜어주고 있지만, 이 역시 끊임없이 반복하는 단조로운 순환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은희경’이라는 타인에게 말걸기 위해 단조로운 일상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진다.

뾰족한 펜을 든 활달한 여검객

차와 책의 향기가 있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 은희경씨가 들어선다. 1959년생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젊은 얼굴에, 그만 너무 젊어 보이고 예쁘다는 말은 건넨다. “그런 소리 듣는 맛에 살죠”라고 새침하게 웃는 은희경씨의 활달함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주위의 공기마저 편안한 모습을 되찾는다.

순결이란 그런 것이다. 조금씩 더럽혀지는 게 아니라 단 한 번에 찢겨 나간다.

은희경의 소설은 뾰족하다. ‘이런 것은 잘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 독자의 안이한 기대를 저버린 채, 작은 펜으로 가슴을 꼬집고 찔러 기어코 피를 낸다. 두 번째 장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밝힌 순결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은 사람들을 제법 슬프게 한다. 이밖에도 그는 사랑과 결혼의 일반적 통념을 뾰족한 독설과 농담으로 뒤집어 독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낸다. “이 때문에 실연을 많이 당했냐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는 웃음을 머금는다. 하지만 날카로움과 상처만 있다면 어찌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마조히스트가 돼 그의 소설을 탐독했겠는가. 은희경의 뾰족한 현실 지적은 작가 특유의 활달함을 만나 경쾌함을 획득한다. “1970년대 학번인 우리 세대가 지니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길 바라며 『마이너리그』를 썼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무겁게만 봐왔던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활달하고 가벼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거대한 담론으로서 존재하던 사건을 보통사람의 눈으로 희화시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창작의 고통과 즐거움

은희경은 서른이 훨씬 넘어 등단한 늦깎이 소설가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었지만, 생활비도 벌어야 했고 결혼도 해야 했기에 이런 일들을 어느 정도 처리한 후에야 글을 본격적으로 쓸 수 있었다”고 그는 얘기한다. 그의 신춘문예 등단 작품은 처음으로 쓴 소설인 「이중주」. 그리고 그때 함께 내보인 다섯 작품이 모두 단편집 『타인에게 말걸기』에 실려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습작이란 없었던 것. 때문에 그는 천재성을 지닌 작가이며 소설도 매우 쉽게 쓸 거라 추측했지만 작가는 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 모습은 빛을 잃은 낮달처럼 테두리뿐이었다.

「연미와 유미」에서 말하는 ‘빛을 잃은 낮달’은 지친 작가의 모습이기도 했다. “작품 하나를 다 쓰고 나면 2~3킬로그램 정도가 빠지며, 눈도 움푹 들어가고 얼굴도 이상해진다”고 그는 자신이 유난히도 신경을 많이 쓰며 힘들게 작품을 쓰고 있음을 고백한다. 문장의 길이와 인물의 성격 등은 어떻게 할 것이며, 어느 만큼의 분량이 지난 지점에서 어떤 사건을 발생시킬 것인지 등 사소한 부분 하나에도 머리를 많이 쓰고 치밀하게 구성했다. 이런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독자는 속도감 있고 술술 읽히는 문체와 재미있고 탄탄한 구성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소설을 다 쓰고 나면 그 기쁨과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그는 창작의 즐거움을 얘기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은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사랑과 결혼

여러 인간관계를 통해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다루는 은희경. 그는 “많은 여성들이 자기가 만든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속박당해, 사랑을 오해하고 스스로 힘들어한다”고 여성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어서 그는 “사랑을 정면에 두고 그것에만 목을 맨다면 사랑을 알지도 못하며 성취도 못한다”고 따끔하게 훈수를 둔다. 이런 그의 생각이 투영돼 있기에 독자는 은희경의 작품을 보며 그가 사랑이나 결혼에 회의적일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그는 단지 “결혼을 너무나 신성시해 깨서는 절대로 안될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여성들이 많아 그러한 결혼관념을 깨고 싶었다”는 것. 사랑과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되, 이에 대한 잘못된 환상이나 기대를 버리고 조금 더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그는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오래 살다보면 상대의 다른 장점이 계속 발견되고, 사랑을 연습할 수 있다”며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혼의 장점을 밝히기도 했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인생에 대해 무서우리만큼 냉혹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은희경 작가. 그의 언어는 많은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타인에게 말걸기』와 『마이너리그』는 국내를 넘어서 중국 독자들과도 마주하게 됐다. 이제 인터뷰가 끝나고 이틀 후면 작가는 중국에 팬 사인회를 하러 떠난다. 오는 12월쯤 나온다고 하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벌써부터 그립다. 그때까지 잠시만 안녕.

윤성훈 기자  saintange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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