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잠수하는 건 어떤 느낌이지?”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공포, 불안, 고독, 어둠. 그리고 약간의 희망.” 혼란스런 감정의 마지막에 ‘희망’을 덧붙이는 여자의 대답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 새로운 내가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게 되지.”

 

▲1995년 작(作)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음울한 색채로 그려지는 근(近) 미래 정보사회의 모습 속에는 인간과 사회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내재돼 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싸이보그를 통해 풀어내는 작품의 주제의식은 현재의 자기 존재가 스스로를 제약하는 가장 큰 한계선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존재에게는 현재의 자신으로 남으려는 집착을 버리라한다. 바로 그것이 보다 나은 주체로의 ‘상승’이자, 정체성의 고민에 대한 ‘변화’라는 해결책이다.

 

▲이야기가 내딛는 결론의 대척점에는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단어가 버티고 있다.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는 ‘매너(manner)’라는 단어에서 형식의 그물 아래 갇혀진 지루한 반복을 연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매너리즘의 사전적 정의는 ‘일정한 기법이나 형식의 되풀이로 독창성과 신선함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뜻한다. 문제의식을 배제한 과거의 무조건적 답습과 현재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의식이 결국엔 존재마저도 박제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부패할지도 모를 일이다.

 

▲매너리즘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의 관성’일 것이다. 현재의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지금의 방식이 최선이라는 생각,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변화의 시점이 바로 지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자칫 매너리즘으로 이어지기 쉬운 이 같은 의식들은 대학언론 기자로서 겪어온 내 지나온 날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니들은 어쩜 그렇게 변한 게 없니. 신문이나 조직, 그 안에서 고민하는 문제들마저 똑같이 대물림되는 것 같아”라고 말하던 한 선배의 한숨. 이미 오랫동안 제기돼온 대학언론을 향한 비판들을 알고 있고, 그것의 문제점이나 변화의 필요성에도 공감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혹은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답변에 귀결됐다.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던 아니다. 하지만 상상을 현실에 재현하기 위한 노력, 관성의 법칙에 균열을 내기 위한 자극이 얼마나 많은 ‘현재’를 버려야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변화’가 언제나 보다 나은 미래만을 예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현재’라는 저항을 이겨내야 하며,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과도기적 혼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새로운 자신으로의 도약만이 존재의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는 필연적 선택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같은 깨달음은 깨달음 그 자체로 멈춰 서 있지 않는다. 무엇이 ‘최선’인가를 고민하고 어떻게 ‘열심’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당장에 모든 ‘현재’를 버릴 수는 없지만, ‘현재’를 극복해가는 노력에 뒷걸음질치지는 않으려 한다.

 

▲어쩌면 내게는 이런 질문이 던져질지도 모른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당신네 공간의 변화를 희망하느냐고, 어쩌면 희망조차도 또 다른 이름의 매너리즘은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자신 안의 ‘매너리즘’을 고민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우리들 스스로의 의지를 믿고자 한다. 언젠가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새로운 존재로 극복될 우리 자신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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