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특별법 시행이후 ‘역풍’이 거세다. 우리 사회는 오랜 동안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해왔지만, 처벌되는 사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누구도 법에 의해 규제 받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정교한 방식으로 자기 확장을 해온 성산업은 이제 한국 사회의 거대
‘권력’이 되었다. 이제까지 성매매는 성을 파는 자와 성을 사는 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논의되면서 마치 자유주의적 개인의 선택인 것처럼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번의 특별법은 성산업을 만들어내고, 여성의 성을 팔아 이윤을 얻는 자, 즉 포주와 업주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성매매
여성들이 마스크를 낀 채 데모를 하는 광경이 뉴스를 통해 방송될 때, 주변의 업주들은 ‘맨얼굴’의 평정한 목소리로 “나는 그렇다 치고 당장
거리가 나앉게 된 우리 ‘종업원’들의 생계는 누가 책임질거냐”고 항의한다. 감금, 인권유린, 폭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매춘 여성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대변하고 있다. 성매매가 불법이란 것을 알면서도 성매매를 하던 ‘고객’이란 사람도, 이 법은 매매춘
여성들의 탈성매매를 지원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부족하다며 법의 유효성을 비난한다. 그들의 비판은 다 옳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비판을 듣는다는 것은 왠지 ‘상식’이란 이름의 어떤 것이 심하게 훼손당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성매매’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얼마나 ‘자기모순’을 정당화하면서 잘 살아왔는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성매매와 관련한 자기 수치와 인격성의 문제, 타자의 몸에 대한 강제와
폭력의 문제는 다 사라지고, ‘비정상성’의 ‘합리화’만 남아있다.
이 법에 의해 성매매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사실 이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학자들도 이것이 장기적인 대책
없이 ‘선언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의심과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법이 가진 ‘교육적 효과’를 기대한다면, 여성과 소녀들의
총체적 인격이나 미래의 가능성들을 단순히 ‘몸’으로 환원시켜, 그것을 구매, 전시, 이동시키면서 돈 잘 버는 ‘사업갗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법이다. 쇼 윈도우 앞에 분홍 드레스를 차려입고 앉아있는 여성들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전화방,
보도방, 단란주점, 비즈니스 클럽 등 유흥업으로 버텨나가려는 나라가 이제 ‘정신’을 차리려한다는데 시민으로서 지지안할 이유가 없다. 국내에서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이나 섹스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은 단순히 돈을 지불하고 욕망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여성,
어린이, 소년, 소녀들이 인신매매적 회로망으로 흡수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이들의 삶의
고통은 자기 눈앞에서 보이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욕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몸을 팔아’ 돈을 벌려는 여성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에 성매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습관적으로 들이대는 수백만 가지의 이유들 앞에서 법도 무력해지고, 사람들도
무감해진다. 성매매와 관련해서는 ‘개인적’인 선택이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구체적인 타자의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체제가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상한’ 방관자나 적극적인 성매매자 모두 인신매매적
연결망을 강화시키는데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상호 연결돼 있고,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이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 것이 앞으로 성매매를 사유하는 출발점이 돼야 할 것 같다.
/김현미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