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오늘은 안개가 짙게 끼었습니다. 운전조심하세요.”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늘 감기조심하세요.” 드물지만, 새벽이나 늦은 밤, 이런 문자메시지를 받는 때가 있다. 그 학생들의 고민을 알고 있는 나는, 이 경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혹, 엉뚱한 작별인사를 보내는 것인가, 번개처럼 스치는 내 걱정을, 사람들은, 신경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선생노릇하면서 난감한 때가 있다면, 전문적 훈련이 없는 내가 학생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순간일 것이다. 중년의 내 눈에는 여리게만 보이는 이 스무 살 남짓한 영혼들에 이렇게 무거운 삶이 얹혀있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힘든 상처를 이야기하는 학생들 앞에서 눈시울을 붉힌 적도 있지만, 그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공감의 눈물보다는 전문의의 도움이었다.

슬픔은 세상이 공허해지지는 것이지만, 우울증은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진단한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도 한다. 지배집단은 ‘비정상’을 범주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상성’을 규정하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는 이 시대에, 더욱이 우리가 기억하는 인류역사가 광기로 얼룩져 있는데, 누가 감히 ‘정신질환’을 말할 수 있을까마는, ‘비정상’이란 무자비한 딱지를 면하기 위해 자신과 주변 사람의 정신적 고통을 감추는 것은 무지의 유물일 뿐이다.

나는, 한 개인이 정신의 안녕을 향유하는 데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그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부류에 속한다. 한국의 대학들이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하바드대학교의 보건진료소에는 정신과가 따로 있다. 그 곳을 찾는 학생들은 여덟 번에 걸쳐 무료로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갑작스런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핫라인도 24시간 가동된다.

대학생들의 어느 정도가 얼마만큼 심각한 불안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지 통계조차 접한 적이 우린 없지만, 그 비율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평균 수명이 80세로 늘어난 이 시대에, 자신의 정신적 외상이 해결되지 않은 채, 아니 해결되지 않았기에, “천(千)의 얼굴”로 공격해오는 정신적 고통을 안고 그들은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고통의 반복적 엄습 속에서 남은 60년을 보내야 한다면, 그들의 장년기와 노년기가 결코 건강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 게다가 정신과상담과 치료는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학생들로서는 쉽게 엄두를 낼 수도 없다.

20대의 삶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 땅의 젊은 학생들이 더 이상 ‘자아의 빈곤’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기 전에 학교가 손을 뻗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명목적 평등의 기치아래 학생선발의 자율권조차도 심히 침해당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선발한 학생들에 대한 우리의 긍지와 신뢰, 애정과 책임감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일은 아직 가능하다.

그들의 고통의 일부분이라도 보살필 수 있는 정신의학적 치료체계를 학교 안에 마련해야 할 때다. 학생상담소의 설문조사와 간단한 진단이상의 적극적 치료, 즉, 적어도 정신과 전문의의 상담과 치료를 일정기간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길게 보면 공동체를 위한 보살핌이며, 앞날을 위한 투자일 것이다. 우리를 선택한 젊은 그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해서 그들이 빈곤했던 자아의 향기를 되찾은 훗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별을 보게 되었노라."

/신경숙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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