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스며든 이중섭의 흔적을 찾아

소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려서 ‘소의 화갗로 불리는 천재화가 이중섭.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뛰어난 예술적 기질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40년의 짧은 인생 동안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작품 생활을 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 원산을 떠나 부산으로 그리고 다시 제주도로 통영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기구한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기나긴 피난 생활 때문에 서귀포에서도 궁색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미술평론가 오광수씨의 말처럼 서귀포 시대는 한국전쟁 이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술을 향한 열정을 마음껏 뿜어냈던 시기였다. 제주의 오름에도 붉은빛이 물들어갈 무렵, 그가 서귀포에서 느꼈을 가난 속의 낭만을 떠올리며 아직 미처 풍화되지 않은 이중섭의 발자국을 따라가 봤다.

제법 바람이 싸늘해진 만추의 끝자락에 찾은 화순해수욕장은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지난 1951년 1월 9일 이중섭이 부인과 두 아들 태현, 태성을 데리고 이 곳에 힘겹게 도착했을 때도 지금처럼 자욱한 안개가 그들을 쓸쓸히 맞이했을까. 피난길에서 겪어야 했던 서러움이 서려있는 안개를 뒤로 한 채, 이중섭 가족은 꼬박 사흘 밤을 걸어 한라산 남록(南麓)으로 향하게 된다. 거센 눈보라를 피하면서 힘들게 도착한 장소, 그 곳이 바로 서귀포 알자리동산 마을이다. 이중섭이 지난 1951년 1월부터 그 해 12월까지 기거했던 마을에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귀포의 서귀동 어귀에 들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이중섭 거리’. 이 길을 벗삼아 따라가다 보면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우뚝 솟아있는 이중섭 미술관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에는 이중섭의 작품 중 「섶섬이 보이는 풍경」, 「가족」, 「아이들」, 「게와 가족」 등 총 4점의 원본이 소장돼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대표작 「황소」의 사본이 우리를 압도했다. 붉은 색의 선명한 색감과 소의 외침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울부짖는 소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니 이 작품이 그의 ‘득의작(得意作)’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파란 게와 어린이」를 감상하던 손경자씨(54)는 “이중섭의 그림만큼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작품이 없다”는 말로 그림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았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이중섭 미술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가 몸을 뉘였던 집 한 채가 여전히 예전 그 숨결을 간직한 채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이제는 낡아버린 초가집, 그러나 50년이 넘는 세월의 풍랑도 천재화가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네 식구가 살았다기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1.5평짜리 좁은 방. 그 방 한 귀퉁이에는 그가 직접 지었다는 시 「소의 말」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 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가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을 지향했다는 사실을 가늠케 했다.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서귀포 외딴 방에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9살 때 이중섭과 이웃해 살았다는 주민 강치균씨(62)는 그를 “키가 크고 항상 우수에 차 있었던 분”이라 회상했다. “아이들과 서귀포 바다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 화갚라고 말하는 강씨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중섭은 멀리 서귀포 앞 바다를 내다보며 마당에서 그림 그리기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의 대표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숲이 우거져 있다는 무인도, 섶섬을 바라보며 바로 그 마당에서 완성시킨 작품이다.

서귀포 풍경, 예술로 승화되다

“이중섭이 바닷가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게를 잡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는 강씨의 말을 듣고 자구리 해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 마당에서는 보이지 않던 섶섬과 문섬이 나란히 눈앞에 펼쳐지자 마치 그의 풍경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가 자구리 해안에서 잡았던 게는 배고픔을 달래는 식량이자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그림의 소재였다. 고은 시인은 “서귀포에 와서 처음으로 그의 예술을 통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소재로 게를 발견했다”고 일찍이 이를 증언한 바 있다.

당시의 행복한 순간을 회상하며 일본에서 그렸다고 알려지는 「그리운 제주도 풍경」. 이 그림은 자구리 해안에서 게를 잡으며 즐거워하는 이중섭 가족의 행복했던 한 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서귀포의 풍경을 앞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풍경화에 자주 등장했던 문섬은 이미 공사현장에 가려진 지 오래고, 그가 게를 잡았다는 바위 해안도 조만간 매립될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자구리 해안에서의 아쉬움도 잠시, 어느새 우리의 마음은 정방폭포로 향하는 길목에 맞닿아 있었다. 길가를 따라 끝없이 이어선 감귤나무. 감귤나무의 싱그러움은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서귀포의 환상」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감귤밭이 낙원인 양 천진난만하게 귤을 운반하는 아이들과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부리에 귤을 물고 있는 새들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서는 남쪽으로 무사히 왔다는 일시적인 안도감이 느껴진다”는 좬이중섭 평전좭의 저자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평이 이 그림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감귤밭이 이어지는 길을 지나 정방폭포에 도착하자 거센 물줄기가 바다를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폭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데도 옷이 물에 젖을 정도로 위치에너지를 머금은 물방울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민들레씨, 그 자체였다. 이중섭의 그림에 폭포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지만 정방폭포로 게를 잡으러 가면서 간단한 화구를 갖고 갔다는 일화는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회자되고 있었다.

제주도가 중섭에게 남긴 것

이중섭은 자구리 해안과 정방폭포처럼 집에서 가까운 곳을 주로 찾았지만 더 먼 곳에 가고 싶은 동경을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 마라도, 한라산에 가지 못한다면 한심한 일이야”라는 말을 자주했다는 이중섭. 하지만 4·3 사태의 공포가 사그라들지 않은 그 당시에 서귀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방랑벽에 익숙해진 나그네처럼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위해 도보로 제주도 곳곳을 찾아다녔다.

당시 제주도 여정에서 포착한 순수한 눈망울을 간직한 소의 모습과 한라산 중턱에 많이 살았다는 갈가마귀는 훗날 그가 그렸던 대표작 「흰 소」와 「달과 까마귀」의 중요한 모티브가 돼주었다. 에메랄드 빛이 얇게 흐르는 바다와 감귤나무, 게, 물고기, 아이들의 순수함…. 세월이 흐른 지금, 여전히 이를 곱게 품고 있는 남쪽의 섬은 이중섭에게 생활의 평온과 대작의 동기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제는 신화가 돼버린 화가 이중섭이지만 그가 가졌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여전히 서귀포 땅을 아스라이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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