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카치오의 '데카메론'

고전(古典)이 된 금서(禁書). ‘10일간의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데카메론'의 행보를 요약하면 이렇다. '데카메론'은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인간적 쾌락의 추구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출간 당시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고 오랜 기간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 디 켈리노는 14세기를 살았던 시인이자 학자다. 저자는 서사(序詞)에서 이 책을 쓰는 동기를 불행한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 주기 위함이라고 밝히면서 페스트에 관한 기술로 작품 제1일의 서화(序話)를 시작한다.

페스트가 피렌체를 휩쓸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꽃의 도시라 불리던 피렌체는 폐허가 돼갔다. 시체만 뒹구는 황량한 도시의 한 성당 안에서는 7명의 귀부인이 모여 살아갈 궁리를 모색하던 끝에 피난을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던 중 세 명의 청년들이 성당을 찾아오고, 피신에 동행하게 된다. 교외에 있는 피에졸 언덕의 별장으로 떠난 열명의 남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첫째 날과 아홉째 날은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둘째 날부터 ‘고난 끝에 온 행복’, ‘자기가 바라던 것을 노력해 차지한 사람’, ‘사랑이 불행한 결말로 끝난 사람들’, ‘연인이 시련 끝에 행복해 지는 사건’, ‘재캄, ‘부인들이 사랑 때문에 남편을 우롱하는 얘기’, ‘남녀가 서로 속고 속이는 얘기’, 그리고 마지막 날은 ‘너그러움’을 주제로 진행된다.

이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는 언뜻 의미없는 한담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면에는 음란하고 방탕했던 당시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또한 외설적인 이야기를 접한 정숙한 부인들은 처음에는 화를 내지만 곧 소리죽여 웃게 되고 나중에는 큰소리로 웃으며 동감한다. 이들의 태도 변화는 가식의 베일을 벗고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당시 시민들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이에 '데카메론'은 중세에 종지부를 찍고 인간 이성의 근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서양문화의 유산’을 강의하는 사학과 김경현 강사는 “'데카메론'의 근대성은 인간에 대한 분석적 성찰과 외부 세계에 대한 구체적 파악에 있다”고 설명한다. 가톨릭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던 인간의 욕망을 솔직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시도했던 것이다. 섹스의 해방과 기쁨, 성직자나 서민이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평등의식 등이 이야기의 주류를 이룬다. 귀부인은 정숙함이라는 가면을 벗고, 간통조차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으로 인정된다.

'데카메론'의 이러한 사실주의 서술은 문학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를 필두로 근대의 문학은 신(神)에 대한 찬미로 일관됐던 중세 문학의 한계를 벗고 인간중심의 문학으로 거듭난다. '데카메론'의 내용이 너무 음란하다는 사람들의 비난에 보카치오는 ‘세상의 부인들이 좀더 도덕적인 화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나도 좀더 도덕적인 것을 취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데카메론'은 왕후에서 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삶을 현실 그대로 온전히 담아냈다.

'데카메론'은 암흑기에서 르네상스 시대로 변하는 역사 한가운데에 서 있다. 변화하는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사조를 꿰뚫어 본 보카치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종교라는 굴레 속에서 꿈틀대던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우리의 의식 속에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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