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에는 많은 것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을 비롯한 기호에 맞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 속의 식음료를 취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에 나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다. 끊임없이 직면하는 선택의 상황에서 취사선택의 공방은 취향에 부합하는 쪽으로 귀결될 때 가장 유쾌하다.

취향은 마음이 쏠리는 방향(趣向) 혹은, 취중에 느끼는 즐거운 경지(醉鄕)니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즐거움을 억지로 거스르려고 하지 않고서야 그것을 취하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얼핏 한량(閑良)들 사이에서나 논할 법한 취향의 문제는 원초적으로 좋고 싫음의 양분화된 감정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사람의 인상과 인격을 만들고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등 개인의 삶 전반에 관여함을 알게 된다.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The Road Not Taken」─ 이 구절은 모두가 ‘예’라고 하는 상황에서도 소신 있게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나를 만들고 지켜가는 데 언제나 힘을 준다. 개인의 남다르거나 독특한 취향이 타인의 시선이나 암묵적 혹은 노골적 강요에 의하여 접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예’든 ‘아니오’든 양자택일의 상황이라면, 결론은 당연히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쪽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취향에 따른 취사선택의 문제는 개인의 내적 발견과 그에 따른 발전 에 영향을 주는데, 이에 관해 이외수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신청곡 목록에 자주 등재되는 음악들 외에는 귓구멍이 꽉 막혀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디마이너 교향곡에 대해서는 아무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는 표현이 한결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물론 몇 번을 거듭해서 들은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세자르 프랑크가 펼쳐 보이는 암청색 소리의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신의 음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내 취향이 아니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을 곱씹어보고는 그것으로 하여금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Serendipity-우연한 행운-다.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알고 즐기며 살아가는 것은 물론 행복한 일이지만 외곬수로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집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나의 탐미주의적 취향은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콜렉션을 나의 눈, 귀, 입, 코, 피부 등 온 몸 구석구석에 곱게 담아가는 기행의 과정을 반영하는 결정체가 된다. 옛 선현은 ‘악의악식을 부끄러워하고 꺼리는 사람과는 더불어 덕을 논할 수 없다’고 했다. 허름한 옷, 초라한 음식을 부끄러워할 생각은 없지만 기회가 닿는 한 내 취향에 부합해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억지로 피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취할 뿐이다.

/이양희(간호·2)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