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나리, 수양대군이 전하를 내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옵니다. 이를 어찌 하면 좋사옵니까.” 아찔하다. 지금 이 세상은 여기, 화장실보다 더 구린 세상이다. 똥통 안으로 내려가 몸을 적시자. 내려가서 비교해보자. 조카를 폐하고 자기가 왕이 되는 이 세상이 더 구리냐, 대대로 봐온 변이 한 가득 모인 삼각산 중흥사 똥통이 더 구리냐.

이미 다섯 살 때,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보이고 임금의 은혜를 입은 김시습. 그런 그이기에 “빨리 성장해서 나와 나의 후계자들을 보필하라”고 당부하던 세종의 목소리가 단종 폐위사건 이후 끊임없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위대한 임금의 당부도, 천재의 비분강개도, 무너진 현실 앞에선 속수무책일 뿐. 젊은 유학자는 대성통곡하며 책을 불태우고, 머리를 깎는다. 그는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떠돌이 중이 된다.

세살 때부터 한시를 지은 천재로 알려긴 김시습은 그 후 기인, 광인, 걸승 소리를 들으며 팔도를 정처 없이 떠돈다. 북으로 안시향령,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에 이르기까지 9년 동안을 방랑하며 『탕유관서록후지』, 『탕유관동록후지』, 『탕유호남록후지』 등을 쓴다. 미친 듯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며, 세조가 설법을 요청하면 똥통에 빠져 광기를 부리거나 거리에서 거침없이 방뇨도 했던 그였지만 그의 유랑이 기행적이고 광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중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으면서도, 수염만은 깎지 않았으며 유학자로서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다. 하루에 몇 번이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고민은 김시습의 정처를 지금의 경주 남산인 금오산으로 이끌었다. 1백80여개의 봉우리, 30여개의 계곡을 품고 있으며 1백여곳의 절터와 1백50여개의 석탑과 불상이 남아있는 금오산. 바로 이 곳에서 한국 최초의 소설이 탄생한다. 『금오신화』를 중국 「전등신화」의 모방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지만, 이는 『금오신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금오신화』는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고 고발하는 현실 비판적 소설로, 주역의 철학 또한 담고 있다. 설성경 교수(문과대·국문학)는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의 주인공은 이생이 아니라 그의 부인 최씨”라고 말한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해 결국은 부인을 지키지 못한 이생은 당대의 변절한 지식인을 풍자한 것이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절개를 지키고 죽음을 맞이한 최씨는 사육신 등의 충신을 표현한 것이다. “최씨의 집이 선죽리인데, 이는 고려 말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의 혼을 이어받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설교수는 덧붙인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금오신화』 다섯 작품들의 순서 배치는 『주역』에서 끊임없이 음양의 조화를 찾는 ‘태극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앞의 두 이야기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간과 귀신’을 다루며, 뒤의 두 이야기 「남염부주지」와 「용국부연록」은 ‘꿈과 현실’을 그린다. 그 중간에 있는 세번째 작품 「취유부벽정기」는 ‘꿈과 현실’의 가운데쯤 있는 ‘술’과 ‘삶과 죽음’의 가운데쯤 있는 ‘선녀’를 그리는데, 이는 태극 파장의 ‘가운데 선’에 해당한다. 이질적인 성격의 두 부류를 세번째 작품이 가운데에서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곧 『주역』의 태극이다.

이어서 설교수는 “김시습은 가장 핵심적으로 하고 싶은 메시지를 네번째 작품 「남염부주지」에 담았다”고 설명한다. 『주역』을 공부한 박생이 꿈 속에서 염라대왕의 왕위를 이어받는다. 「남염부주지」는 유일하게 시공간이 현재이며 주인공이 왕이 되는 이야기로, 당시의 왕인 세조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의 바람이 담겨져 있다. 결국 「전등신화」의 전기적(傳奇的) 요소는 현실을 비판함에 있어서, 그것을 숨기는 하나의 장치로써 사용된 것 뿐이다.

불운한 시대는 역사에 한 천재의 이름을 남게 했다. 단종 폐위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김시습의 철학과 현실 비판의식을 담은 『금오신화』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더러운 현실과 비교해 보기 위해 똥통에 들어가는 용기,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은 깎지 않은 그의 단호한 의지는 어두운 현실에 대해 시대와 역사만을 탓하는 우리들에게 귀한 채찍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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