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토론문화를 말하다

 얼마 전, 유럽의 한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다녀 온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다. 대부분의 전공수업이 튜터와 소수의 학생 사이에 토론으로 진행되는데, 언어의 장애에서 오는 곤란한 점 말고도, 서슴없이 토론에 끼어들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온 이 엄숙한 학생은, 질문을 만드느라 너무 머리 굴리는 사이에, 늘 옆 사람에게 기회를 놓쳤다.

그것은 답변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하지만, 우리는 너무 ‘거대담론’에 사로잡혀 있다. 질문을 하건 답변을 하건, 한마디로 좌중을 제압할 ‘촌철살인’에 목숨을 건다. 우리 대학의 학습공간에서 토론이 흔히 알맹이 없는 시간으로 여겨진다. 그 까닭은 역설적으로 너무 알맹이를 강조해서다. 처음부터 부담만 안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시 앞의 학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질문과 답변이 너무나 사소하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것들이어서 심심하기 짝이 없더란다. 토론에 쉽게 끼어들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튜터는 끝까지 냉정함과 진지함을 잃지 않은 채 수업을 진행했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에도 짜증내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진행되는 수업이 어느덧 문제의 핵심을 찾아가고, 유효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몇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 자신만 잔뜩 긴장되고 목에 힘이 들어가, 정작 해야 할, 할 수 있는 이야기도 기회를 놓치게 됐다고, 예의 학생은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고, 오늘 우리대학교의 토론식 수업에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토론에 대한 학습은 정규 교과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제도적으로 토론식 수업이 많아, 학생들은 쉽게 그것을 실습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훈련된 교수자가 학습자들을 일정 부분 유도해 나가야 한다.

우리대학교의 현실을 짚어보자. 토론을 통한 학습기회는 매우 제한돼 있다. 나도 강의에 참여하고 있는 ‘독서와 토론’의 경우, 지금 학내에서 꽤 모범적인 토론식 수업으로 정평을 얻어가고 있는데, 이를 수강한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같은 규모의 본격적인 토론수업을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상대적으로 꽤 상황이 좋다는 상경대와 법과대 학생들일수록 더하다. 사실 모든 강의는 소수의 인원으로 제한돼야 한다. 그 숫자를 초과할 경우, 몇 개의 반이든 분반해서 교수의 강의내용을 충분히 전달할 튜터를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형강의만 넘쳐난다.

토론은 학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현실은 토론을 가르치는 몇몇 수업만이 토론수업이다. 어디 한번 써먹어보지도 못하면서. 사실 토론식 수업이야말로 교수자에게나 학습자에게나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자면 일상화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어떤 일이건 자주 해볼수록 익숙해지지 않는가. 기회가 많다 보면 말을 풀어나가기도 쉽다.

거대담론이나 촌철살인에 목매달지 않아서 좋다. 학교는 이런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한다. 교수자는 학습자에게 처음부터 알맹이를 지나치게 강요하지 말고, 학습자는 인상 깊은 한마디로 점수 따기에 너무 급급하지 않으면 된다. 이것이 곧 토론식 수업이 갖춰야 할 시스템이다. 편안한 대화를 나누듯 토론하는 수업이, 끝내 서로 가진 정보를 공유하게 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확인하게 하고, 가장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고운기 (문학박사·학부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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