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부쩍 높아져 가는 가을 하늘을 앞세워 언덕을 하나 넘으면 용인의 작은 마을이 눈 앞에 펼쳐진다. 고층 아파트를 뒤로 하고 다다른 이 마을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어느 화가와 그의 든든한 후원자간의 신뢰와 추억을 담은 미술관, ‘이영미술관’이 바로 그 이름이다. 자그마한 마을, 이 곳에 미술관이 자리하게된 사연은 무엇일까. 누구의 작품이 이 미술관을 채워놓았을까….

이 곳에서는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민족혼의 화가 박생광』이 열리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수많은 화폭을 메운 생생한 작품의 색감에 놀라게 된다. 전통의 색 ‘오방색’(파란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을 이용한 이 그림들은 고(故) 박생광 화백(지난 1985년 작고)의 작품이다. 오방색은 예로부터 ‘탱화색’, ‘단청색’이라고 불리며 민화나 탱화만의 색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고 박화백은 이를 ‘민족’의 색채로 포착, 그 색을 이용해 한국인의 감정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그의 대표작인 역사화 「명성황후」는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커다란 캔버스에 담긴 시대의 비극과 민족의 서글픈 목소리는 보는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의 메아리를 불러온다. 국토를 짓밟는 말발굽과 거꾸러진 궁궐의 모습은 화가의 붓과 함께 요동치며 그 슬픔을 더한다. 그리고 울부짖는 백성들과 힘없는 군인들의 모습 사이로 흰 옷을 입은 명성황후의 모습이 보인다.

비참하게 스러져갔지만 그림 속의 황후는 평화롭고 아름답게 미소짓는다. 그 모습을 둘러싼 금빛과 은빛의 원은 환생을 의미한다. 비극을 비극에서 멈추게 하지 않고 미소와 생명으로 승화시킨 그의 그림은 그렇게 한국인의 생명력과 희망을 표현해낸다. 또 다른 작품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을 그려낸 역사화다. 당시 민중들이 이끌어낸 거대한 운동의 진실은 그의 작품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가 즐겨 그렸던 굿을 하는 무녀의 모습이나 마을 앞 당산나무의 모습이 담긴 그림은 풍속화나 수묵화만을 우리의 그림이라 생각하기 쉬운 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진정한 소망과 생명의 원천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고 박화백의 초기 작품에는 이처럼 또렷한 색채가 사용되지 않았다. 화려한 색을 통해 혼을 담고 싶던 작가는 색채화가 홀대받던 시절, 그리고픈 그림만 그리고 살기엔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그는 ‘진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끔 해준 인연을 만났다. 누구보다 애정어린 눈길로 그림을 바라보며, 여느 때보다 바빠진 손길로 그림을 설명하는 사람, 그가 바로 미술관장 김이환씨(70)다. 그를 돕게 된 이유를 “그냥 그림이 좋아서”라고 말하는 김씨는 박화백을 기억하며 평범한 양돈장을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를 만난 화가는 비로소 민족을 기억하고 민족혼을 지키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됐다.

 선비들의 고상한 그림보다 무당의 몸짓에, 민중들의 소박한 표정 속에 민족의 예술과 혼이 있다고 믿은 고 박생광 화백. 역사와 정신, 그리고 전통을 담은 그의 그림은 캔버스의 경계를 넘어 오늘도 고귀한 민족혼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오는 31일까지. (문의: http://www.ie-you 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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