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동문(지난 1989년 사회학과 마침)

 

“내가 연세대학교를 다닌 건지 「연세춘추」를 다닌 건지 모르겠더라구.”

 

「연세춘추」(아래 춘추) 기자라면 공감할 수 있는 우스개 소리의 주인공. 그는 바로 춘추 50기 편집국장을 지낸 백기철 동문(지난 1989년 사회학과 마침)이다. 현재 한겨레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학보사 생활은 고달프지만, 뭔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기자 생활의 생리를 학창시절에 맛봤다”며 춘추시절을 떠올렸다.

 

한때 문학도가 꿈이었던 그는 그저 ‘글쓰기’가 좋아 춘추에 들어와, 지난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춘추활동을 했다. 20년 전 그가 만든 신문을 가져가 보여주자, 백동문은 “아! 대부분 선명하게 기억나지. 당시 엄중한 시국 속에서 신문을 만들어야 했기에 기억이 더 생생해”라며 웃음을 보였다.

 

그의 말처럼 그 시기는 강압적인 군사 정권의 독재로 사회가 억압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사회의 불합리한 면을 고발해야하는 학생기자로서의 책임과 현실적인 제약요건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울분을 삭이며 신문을 만들어야 했던 그는 “외부 검열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조했다. 학내 시위가 허용되지 않던 당시에는 학생운동 시위 매체가 없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신문이 배포중지됐던 시절은 학생 기자인 그에게 감내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학생운동이 불법이던 시기에 “취재를 나가면 취재를 하다가도 같이 시위를 했었다”고 말한 그는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도 많이 뿌리면서 사회에 바른 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춘추는 학내 시위가 금지되고 자율 공간도 없었을 때, 우리 사회나 학생들이 나가야 할 길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학생운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공론의 자리를 마련하기 어려웠던 당시에 춘추가 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이론적 현실 분석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때, 매체로서 주목받던 신문이 바로 춘추였다”며 당시 춘추 기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한겨레 신문사 편집국을 소개시켜 주며, 당시 신문을 제작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토요일마다 조선일보에 가서 인쇄활자로 판을 짰다”며, “전통적인 방법으로 활자 냄새를 맡으며 손수 먹물을 직접 칠해 신문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신문제작 방법은 달라졌지만, 친구들과 밤을 새우며 나눴던 수많은 얘기와 추억들은 변치않고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일’만이 아닌 ‘사람’과 깊은 정을 나눌 수 있는 곳, 그는 “어려운 일도 많지만 서로 이해하며 아껴주는 것이 학보사의 또다른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백동문은 지령 1500호를 맞이한 「연세춘추」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후배 기자들을 비롯한 ‘춘추’에게 자신의 바람을 전했다. 그는 “신문이나 기자는 그 시대 상황을 제대로 투영할 수 있어야 하며,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대학이 개선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기획 취재를 많이 해서, 청년 실업이나 대학 교육의 문제를 다양하게 접근해 볼 것을 독려했다.

 

가끔 인터넷 춘추를 본다는 백동문. “거대 담론을 놓고 얘기하던 과거와 달리 예전보다 훨씬 다양한 얘기를 하고 있는 현재 춘추를 재밌게 보고 있다”고. 그는 앞으로도 학내 구성원의 다양한 욕구와 취향을 많이 반영해 지령 1500호의 역사에 걸맞는 새로운 연세춘추가 되길 기원했다.

 

                    /김윤태 기자 hacru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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