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대표이사 오연호 동문(지난 1989년 국문과 마침)

 

“우리는 오마이뉴스를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22분에 창간했다. 왜 그렇게 ‘2’가 많은가? 우리는 20세기의 저널리즘과 결별하고 새로운 21세기 저널리즘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31일, 오연호 동문이 세계신문협회의 초청으로 ‘오마이뉴스’에 대해 발표한 연설문의 첫마디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로 지난 2000년 오마이뉴스를 창간한 오동문은, 국내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있는 광화문의 한 사무실에서 시민참여 저널리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

 

 


오동문은 “오마이뉴스의 실험은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비주류 언론에서 12년 동안 몸담아 오며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라고 말문을 열었다. 오마이뉴스를 창간하기 전, 그는 12년간 월간 「말」지의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오마이뉴스의 창간배경에 대해 “그동안 보수와 진보가 8:2의 비율을 굳히고 있는 대한민국의 언론지형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어요”라며, “이는 진입장벽이 낮고 쌍방향성이 높은 인터넷을 활용하며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기사와 의견을 쓸 수 있는 ‘열린언론’을 표방하는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이다. 그는 “비주류매체 기자였기에 가질 수 있는 소극성과 「말」지 기자로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나 자신의 당당함과 겸손함을 지니기 위해 이런 철학을 세우게 됐다”고 밝혔다. 한 매체 기자의 고민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는 시민참여 저널리즘을 본격화시켰다는 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제 전 국내외 언론의 미래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이뤄진 오마이뉴스의 실험은 인터넷이 잘 구축돼 있고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은 대한민국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이야말로 ‘대한민국 특산품’이죠”라고 자신하는 오동문의 목소리에는 힘이 그득했다. 그는 오마이뉴스의 개혁이 ‘하나의 이벤트’가 아닌 모든 언론계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발젼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땐 만들어라”

 

 

 


비록 현재 오마이뉴스는 안정된 구조를 갖추며 다양한 특종과 파격적인 형식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과정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오동문은 “지금까지 경영, 자금 등의 위기가 많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작심의 순간’이었습니다”라고 털어놨다. “출근할 때는 새로운 목표를 실천할 생각에 설레다가 퇴근할 때면 안정된 현실에 마음이 흔들리기를 매일매일 반복했지요”라는 그의 말에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까지 피할 수 없었던 고민들이 엿보였다. 하지만 오동문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확신했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며, “뭐든지 ‘확신’만 있으면 가능하더라”라고 말했다. 「말」지 기자 시절 월간지에는 특파원이 없다는 공식을 깨고 직접 워싱턴 특파원으로 나갔던 것도 그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생활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자연스레 대학시절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시골 ‘촌뜨기’ 출신의 오동문은 “처음엔 농촌의 한을 소설로 풀어내고 싶어 국문학과에 왔지만, 사실 전달조차 억압되는 독재시절에 허구적 소설을 쓰는 건 현실외면이라 생각됐어요”라며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된 계기를 말했다. 이후 현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오동문은 전두환 독재, 미군의 불평등, 교육 민주화 등의 내용을 담은 글을 약 2만명의 고등학생들에게 전한 ‘연애편지’ 사건으로 창살 신세를 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격세지감…”이라며 잠시 회상에 빠진 듯했던 그는 이내 “긴장된 나날이었지만 당시 소중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겁니다”라며 미소지었다. 또한 “어떤 학기엔 ‘올 F’를 받을 정도로 학업에는 소홀했지만, 기존의 굳어진 틀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국문학도 나로 하여금 항상 새 길을 모색하게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에겐 도전의 첫걸음을 지지해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땐 만들어라.”

 

 


초간지 기자로 살아남는 법

 

 


바삐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오동문은 짧은 회상을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를 ‘초(秒)간지 기자’라 부른다. 일정이 주어지는 월간지 기자와 달리, 급속한 사회리듬을 반영하는 인터넷 기자는 정해진 시작과 끝도 없을 뿐 아니라 단 몇 초의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초간지 기자가 발견한 유일한 생존법은 ‘스트레스를 맛있게 먹고 사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일을 ‘좋아하고’, ‘잘하면’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 오동문의 모습은 프로다웠다. 이런 프로다움은 신앙생활에 충실하며 항상 자신을 뒤돌아보는 모습에서도 나타났다. 오동문은 지난 1995년 미국에서 생활한 뒤,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간다. “나도 모르게 ‘기자’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자만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며, “지난 한주간 나의 모습을 성찰하고 반성할 시간을 갖기 위해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는 말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한편, 그는 “지금 대학으로 돌아가면 정말 열심히 공부할 것 같다”고 웃으며, “대학은 사회로 나가기 이전의 준비과정이므로 항상 주변과 미래를 꼼꼼히 관찰하며 알찬 시간을 보내십시오”라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이는 수많은 도전과 참여 속에서 직접 깨우친 한 선배의 진심어리고 현실적인 당부였다.

 

1시간 남짓한 짧은 인터뷰 동안에도 오동문은 열 통여의 전화를 받으며 일 처리에 바빴다. 그러나 그를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은 쉴틈없는 움직임보다, 그 와중에서도 앞뒤를 살피는 시각이었다. 현실에 안주하기도 숨가쁘지만, 끊임없는 도전으로 앞을 내다보고 자기성찰을 통해 뒤를 돌아보는 일련의 과정으로 그는 남들보다 한걸음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었던 듯했다. 1년 365일 초간지 기자의 생활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또다시 ‘최초’를 꿈꾸는 그의 몸놀림은 오늘도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혜윤 기자 gkdns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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