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의 작가, 신경림 시인을 찾아서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날나리만 없다뿐, 신경림 시인을 만나러 가는 이내 발걸음은 어느덧 시인의 시 「농무」를 흉내낸다. ‘떠돌이 시인’이라 혹시라도 늦으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릴까봐, 목덜미에는 땀이 송송 맺히지만 두 다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신명난 얼굴이 드디어 시인의 보금자리 정릉에 도착했다.


시인의 떠돌이 기질과 청년시절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자그마한 체구에 소년의 미소를 간직한 신경림 시인이 오늘만큼은 여행을 포기했다. 여행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시인은 틈만 나면 어딘가로 떠나 이방인이 된다. 이번 여름에는 몽골에 다녀왔다고. “떠돌이는 시인의 운명인 것 같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시인이기에 떠돌아다니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시인이 됐고, 그래서 떠돌이 시를 많이 쓴다”고 자신에게 있어서 ‘여행’의 의미를 밝힌다. 이어서 시인은 “여행 중 특히 역 근처에서는 천치와 걸인을 많이 보는데, 가끔은 아무 생각 없고 어떠한 구속도 없는 그들의 삶이 행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잠시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대학시절,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신경림 시인은 예상과 달리 ‘문학 동아리’가 아닌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독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시인은 “독서 동아리에서 아주 난해한 책을 다 읽었다거나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그날의 ‘스타’가 됐다”며 어느덧 까마득해진 옛 시절을 회상했다. 그날의 ‘스타’가 되면 술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는데, 때문에 시인은 경쟁적으로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독재시대의 경찰들은 정말 무식했다”며 시인은 암울한 시대를 웃음으로 회상한다. “당시 경찰은 가택수색을 해서 ‘사회’라는 말이 적힌 책은 모두 다 가져갔으며, 심지어 『사회학용어사전』도 ‘사회’가 적혀 있어서 가져갔다”며 시인은 웃음을 터뜨린다.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은 그대로 놔두고서 『사회학용어사전』은 압수한 것이다. 시인은 웃었지만, 뒤에 이어진 그의 말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마음 놓고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시대가 올지 정말 몰랐다. 이런 시대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시에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고 허무주의적인 색체가 짙은 것도 이때문인 것 같다고 시인은 말한다.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학창시절 우리네 가슴을 저리게 했던 시인의 작품 「가난한 사랑 노레.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있음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의 배경에는 가슴 아프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동네 근처 내가 잘 가던 술집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한 처녀와 그녀를 사랑하는, 노동운동을 하는 한 젊은이를 만났다”며 시인은 아련한 추억을 꺼냈다. 술을 자주 함께 마셨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자가 가난하기 때문에 여자의 부모가 그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신경림 시인이 마치 자기 일인 양, 팔을 걷어 붙이고 그 둘의 결혼을 도와준 것이다. “내가 빨리 결혼하라고 자꾸 부추겼고, 결국에는 그 둘이 결혼을 했지”라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신랑, 신부 친구들 7명 앞에서 결혼식은 진행됐다. 물론 주례도 신경림 시인, 축시도 신경림 시인의 몫이었다. “그 때 지은 축시가 「너희 사랑」이고, 집에 돌아와서 너무 기분이 좋아 하나 더 덤으로 지은 게 「가난한 사랑 노레인데, 덤이 더 유명해졌다”고 시인은 말한다. “지금도 그 둘, 아주 잘살고 있지”라고 말하는 신경림 시인의 표정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내리쬐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 아니라, ‘육중한 탱크 굴러가는 소리’였다”며 시인은 또 하나의 비밀을 소개한다. 군부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탱크’라는 말을 썼는데, 출판 하는 곳에서 ‘기계’로 살짝 바꿔 놓은 것이다. “당시에는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잘됐다”고 그는 다시 한번 웃음을 지어 보인다. “탱크라 그러면 지금 누가 그 시를 읽겠냐.”


시(詩)


가장 최근의 시집인 『뿔』에서 그는, ‘한때는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고 털어놓는다. 지난 1970~80년대에 시인에게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던 억압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나는 민중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시를 써야 하고, 자본주의적 발상과 외래어 등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다”며 그 때는 시 쓰는 일이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시의 생명은 자유이며, 억압이나 구속 없이 뭐든지 열려 있을 때, 좋은 시가 나온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고 말하는 시인의 말은 제법 감동적인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정년퇴직할 필요가 없다.” ‘시인이 돼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이같이 답한다. 또한 “시를 쓰면 모든 것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 역시 매우 좋은 졈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시는 현실 속에서 열심히 일상을 살 때 나오는 것”이라고 그는 항상 말한다. 물가에 앉아서 가만히 명상에 잠긴다고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상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정신없이 살다보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시는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데서 나오는 법이었다. 

 

“크고 힘이 있는 얘긴데, 그것을 가장 작은 말 속에 담는 것이 시”라고 말하는 신경림 시인의 시 향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아니라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를 쓴다면 찾아가야 할 곳 말이다. “나는 어린시절 충주의 남한강 일대를 누볐고, 이 곳에 큰 애착을 가졌다”고 시인은 얘기한다. “그 곳에 수많은 전설, 설화, 민요가 있는데 예전부터 이런 것들을 재구성해서 글을 써보고 싶었다”며 그것이 자신의 시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큰 부품이 됐을 수도 있다고 그는 밝히고 있었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시인이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갯의 맨 첫 구절이다. “부산에 강연이 있어 새마을호를 타고 내려가다가, 갑자기 다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가기가 싫어져 중간에 그냥 내렸다”며 당시 이 시가 나오게 된 배경을 웃으며 말한다. “이런 소문은 나면 안 되는데…”라며 시인은 빙긋이 웃었지만, 언론은 소문내기를 좋아하는 법. 떠돌이 시인다운 일화이기에 어찌 이를 멍하게 놓치고만 있겠는가. 시를 쓰는 일이 즐거워진 시인은 앞으로도 이리 저리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의 시는 지치는 법을 잊어버렸다.


        글/윤성훈 기자 saintangel@yonsei.ac.kr

        사진/이효규 기자 ehyoehyo@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