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환

  

이번 학술기획에서는 사회적으로도 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지식인’에 대해서 다룹니다. 대학생이 된 많은 학생들은 ‘지식인’이라는 단어와 맞닥뜨리지만, 그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적습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지식인의 의미와 그 단어가 가지는 무게를 성찰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지식인과 대학사회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으며, 대학사회가 짊어져야 할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짚어봅니다. 읽는이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식인의 탄생”을 (“비극의 탄생”을 논한 어느 철학자 식으로) 논할 형편은 못되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르네상스 맨’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지성사나 문예사에서 르네상스기(期)만큼 멋진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이 신과 종교에 대해서는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면서 막상 ‘일반 사람들’을 권위주의적인 경멸감으로 대한 반(反)휴머니스트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르네상스 정신의 강렬한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시대적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처음으로 거침없는 활기와 발랄한 생명력으로 진·선·미를 추구하던 화려한 낭만의 시대, 거인과도 같은 기개와 꿈틀거리는 의지로 지식의 신천지를 찾아 나서던 희망의 시대─이런 시대를 주도한 것이 르네상스 맨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탄생을 유독 르네상스 시기에서 찾아야 할 이유는 없다. 르네상스의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거기에는 고대희랍 사상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가지들 끝에는 인간 정신의 드높은 기상이 갖가지 열매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고대 희랍인들만큼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쓴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신의 절대 권위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도전장을 낸 것도 그들이었고, 그릇된 사고와 논리의 종단이 무엇인지 일깨우기 위한 변술을 공공연히 펼친 것도 그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어떤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가? 이에 연관해 문득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말로 ‘천재백캄로 번역될 법한 서양어─좀 더 정확하게는 불어─이디오 사방(idiot savant)이다. 영화 좬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일상생활의 어느 하나도 혼자서 해낼 수 없으면서 수치 계산에 있어서는 가공할 능력을 보이는 자폐증 환자의 역을 한 바 있는데, 이처럼 분명히 정신적 지체 내지 질환 상태에 있으면서도 수학이나 음악 등 어느 특정 영역에서는 기이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이디오 사방”이다. 읽거나 쓰는 일을 포함한 그 어떤 지적 능력도 없는 사람이 물경 15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대략 1925년에서 1930년 사이에 특히 정신의학계에서 관심사로 부각되기 시작한 이같은 천재백치 혹은 백치천재의 존재는 ‘지식’ 내지 ‘지성’의 개념정의에 어려움을 준다. 지능지수 20 이하, 그러니까 소위 ‘치우’(imbecile)보다도 낮은 지능의 소유자가 어떻게 그토록 전문적인 능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와 함께 연상되는 또 하나의 말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유식한 무식자”(learned ignoramus)이다. 1929년에 쓴 좬군중의 폭동』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90년에 이르러 유럽에서 제3세대가 지적 주도권을 잡게 되자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과학자 류와 마주치게 된다. 즉 판단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히 알아야 할 모든 것들 중에서 오로지 하나의 지식에 정통한 사람인 바, 그것에 대해서도 그는 오로지 자신이 목하 연구 중인 한 구석만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전문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좁은 영역 이외의 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자체를 미덕으로 선언하기까지 하며, 지식의 전반적 체계에 대한 그 어떤 호기심에 대해서도 ‘아마추어 취미’(dilettantism)라는 딱지를 붙여 버린다.”

 

“천재백캇, “유식한 무식자”─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이 두 말은 출생 배경만큼이나 어감이 비슷하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우선, 전자의 그 유별난 지식은 학습에 의해 습득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능력, 즉 문자 그대로 ‘하늘이 준 재능’(천재)이다. 반면에 후자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학습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의 주제에 연관시켜 더 중요한 것은, “천재백캇가 대개 ‘자폐적’이어서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하더라도) 사회의 다수에 대해서는 ‘피해’를 끼치지 않는 데에 비해, “유식한 무식자”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타인의 가치관에 대한 척도로 사용하면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부류이며 이런 면에서 ‘위험한’ 존재라는 점이다. “유식한 무식자”가 “대중 인간”(mass-man) 층을 형성하면서 집단의식과 행동을 통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곧 “군중의 폭동”이라는 것이 오르테가의 지적이다.

 

상기 두 용어를 끄집어 낸 것은 오늘의 우리네 사회나 대학의 현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령 컴퓨터 게임에서는 가위 천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주변과의 인간 관계, 아니 주변 상황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오늘날의 일부 청소년은 “이디오 사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런 부류가 우리 사회에 어떤 해악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다. 우리네 교육부의 최고 지위에 올랐던 어느 두 인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가지 분야만 잘 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젊은이들을 향해 꾸준히 전파했다. 그 중 한 사람은 모 대학 총장 시절에 좬한 가지만 똑부러지게 하면 되는거요!』라는 제목의 책까지 썼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대학생들이나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집회장에서 “한 손에는 컴퓨터, 또 한 손에는 영어”를 역설하곤 했다. 그것이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가치창출의 표준이요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실천요강이라는 것이다. 전문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 전략을 효율적으로 귀띔한 셈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 분야를 똑부러지게 하는 사람이 다수 모이면 결국 여러 전문분야에서 높은 능력의 소지자들이 생겨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세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식의 논법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사회가 실로 이뤄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리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전문 영역 선택에 있어 심한 편중 현상을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네 현실이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은 캐치프레이즈는 “유식한 무식자”의 말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사실 오늘날처럼 지적 가치, 아니 인간의 뭇 가치가 상업화하고 금전적으로 환산되는 시대는 아마도 역사상 없었을 것이다. 한탕주의, 치부주의, 졸부현상이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근시안적인 물량주의가 대학에도 밀어닥쳐 학문의 경쟁력이 효용성과 생산성과 물량치 기준에 따라 획일적으로 측정되고 또 재단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도 이제는 시장경제 원리와 무한경쟁 원칙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논리의 한 구석은 출세주의나 배금사상과 은밀히 맥이 닿아 있다고 본다. 학문적 탐구와 그 성과의 전수라는 대학 본유의 과제를 성급한 시장원리에 맡기면서 ‘지식상품’의 개발에 전전긍긍한다면 대체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효율과 비합리를 혁파하여 환골탈태하려는 의지는 매우 바람직하지만 ‘개혁을 위한 개혁’의 물결에 편승한 관료적 업적주의는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말이지만, 요즈음의 대학 교수들은 자기의 입지를 위한 논문 수 충족 조건을 채우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어 ‘가르치는 일’이 오히려 성가시게 느껴질 정도다. 이 시대의 사전은 ‘교수’의 정의를 새로 내려야 할 판이다.

 

우리네 대학교육이 무엇 하나 제대로 (“똑부러지게”)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사회에 배출할 뿐이라는 볼멘 목소리에 성실하게 대응할 필요는 있다. 대학도 어디까지나 사회의 일부인 만큼 대학에서의 학업이 사회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학이 ‘삼성맨’이나 ‘현대맨’ 혹은 벤쳐기업 창업자를 만들어내는 곳인가. 대학교육의 목적이 ‘제품’ 생산에 있는가.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생산된 결과보다는 생산의 원리, 기능성의 연마보다는 창의성의 배양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대학 아닌가. 대학교육의 진정한 의의는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들의 ‘가캄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이 사회와 호흡을 같이하면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정당한 주장의 맞은 편에서, 우리는 대학이 굴절된 사회현상을 바로잡고 현실을 선도할 사명을 띠고 있다는 점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네 대학계는 ‘현실반영’이라는 명제에 매몰돼 ‘현실선도’의 명제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될 때가 있다. 학문연구의 의의를 지나치게 현실적 동기에 연계시키다 보니 오히려 현실파악의 안목은 협소해지고 그러다 보니 현실반영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지 않나 싶을 때도 있다. ‘수요자 중심 교육’이니, ‘경영마인드 도입’이니, ‘신지식’의 창출이니 하는 용어도 실은 현실에 적응하려는 대학의 불안한 모습의 투영이다. 이렇듯 불안과 조바심에 쫓긴 나머지 호흡은 더욱 짧아져 숙성과 온축(蘊蓄)이 필요한 기초학문 분야는 점점 더 홀대받고 있다. 현실에서 좀 떨어져야 그 윤곽이 보이는 법이고 현실초탈의 발판은 이상에 의해 마련되는 것인데, 현실에 너무 밀착한 나머지, 이상의 가치가 너무나도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대학교육에 의해 배출되는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기능인’이다. 지적 추구의 욕구가 현실적인 타산에 바탕을 둔 전문주의에 의해 굴곡될 때 참된 지식인은 생겨나기 힘들다. 학문적 탐구라는 것은 현실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현실, 바람직한 현실에 대한 비젼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이상론’의 형태를 띤다 하더라도 말이다. 현실에 안 맞는 이상이라고 해서 송두리째 폐기처분하는 행위를 계속하는 동안 우리에게는 지적 추구의 방향이 없어지고 만다. 지식인은 ‘있어야 할 현실’ 즉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천의지의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전문지식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정된 영역을 깊이 파고드는 전문가적 자세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자기가 파놓은 갱도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 지성의 다면적 전개를 위해서는 각 분야가 그 나름의 확고한 입지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진지하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수록 혹시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의 이론틀만으로 세상의 뭇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추해 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사실 학문이란 지식 축적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게 자신의 한계성과 대면해 씨름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의의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지식이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미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 개인적인 소견을 대중에게 주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지식은 독선으로 변하기 십상이며, 자신의 지적 명성을 대중 선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은 지적으로 심히 의심스런 존재다. 나는 최근에 “어째서 당장 뛰쳐나가 행동을 보이지 않는갚라는 힘찬 듯한 어조의 발언으로 대학의 젊은이들을 시위의 현장으로 몰고 가려는 어떤 ‘유식자’를 목격한 바 있다. 정치의 계절에 피어난 정치적 심성이 어지러운 세파를 타고 현실을 어느 한 곳으로 단선 환원시키려는 형국이었다. 지식인은 이같은 교묘하게 노골적인 곡학(曲學)의 심상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 지식인을 배출하는 곳이라면 침묵하면서 현실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그 속에 많이 포함시켜야 한다. 지식인의 침묵과 무행동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우리는 흔히 듣지만, 특정 이념에 쉽사리 가담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지식인의 태도가 아니다. 지식인은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않음으로서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값진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남의 말에는 귀를 막은 채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우리의 사회에는 너무 많으며,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혼란해 진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지식인의 기본 소양이다. 판단보류의 회색 빛깔이 흑백논리의 경박함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식인의 능력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란 없으며 단지 상반된 가치관들이 나선형 대립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회가 어디론가 흘러간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지식인의 면모이다. 이는 결코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로의 귀착이 아니라 세상만사의 이치를 간파하면서 마음과 행동거지를 다스리는 지혜다. 지혜로 승화하는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