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을 보면 조선 사신들이 타국 사신과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는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 사극에서야 우리말로 대화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을 터. 우리 선조들은 그들과 어떻게 의견을 주고받았을까. 지난 9일 낮 1시30분부터 위당관 313호에서는 국학연구원 주최로 1부 ‘옛 조선과 만주─통구스와의 관계’, 2부 ‘조선시대 안남국과의 문화 교류―양국 사신간의 필담창화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한 국학연구발표회가 열렸다. 그 중 2부 발표회에서는 20여명의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참가해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다.


2부 발표자로 참석한 전북대 인문학부 하우봉 교수는 조선과 안남국(지금의 베트남)과의 교류를 고려 말기, 조선 전기, 조선 후기로 나눠 발제했다. 하교수는 고려 말기 신진 사대부였던 이숭인이 안남인을 묘사한 시 좥영안남(詠安南)」을 통해 고려와 안남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설명했다. ‘검은 깁 모자에 비단 조복 입었네/…머뭇거리며 감히 천자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하네.’


조선 전기가 되면 교류는 더욱 활발해진다. 이수광과 안남국 사신인 풍극관의 시문창수(詩文創首)는 안남에 조선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하교수는 “시문을 9수씩 주고 받으며 같은 문화권으로서의 동질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양국간의 교류는 줄어들게 된다. 사절단과 교역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빈번했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해결할 적극적 대응방안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소극적 외교정책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와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지 못했음을 지적한 하교수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폐쇄성과 해양활동의 쇠퇴가 사실보다 과장돼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하교수는 “산재된 자료를 정리해 조선시대 해양활동 및 해양국가와의 교류사를 복원하는 것이 절실하다”며 이번 발표회의 의의를 밝혔다.


이어진 토론시간에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최귀묵 교수는 안남과 조선 사신간 시문창화의 의미와 대외 교류사를 연구하는 하교수의 관점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하교수는 “공동문어인 한문을 사용해서 시문을 주고받음으로써 동아시아 한문 문명권의 일원으로서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더불어 대외 교류사를 연구할 때 자국주의관점에서 벗어나 문화다원주의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했다.


차분하게 이어지던 발표회는 개인토론 시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국학연구원 백승철 연구원은 해역사의 자료가 극히 적은데도 불구하고 조선과 동남아시아의 교류에 주목하는 이유를 물었다. 하교수는 “조선은 공도정책과 같은 폐쇄적인 방법으로 인해 바다활동이 저조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안보를 돈으로 사려는 등 조선시대에 비해 나아진 점이 없다”며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덧붙여 “이제는 국경을 넘어서는 해양활동을 할 때며 이를 위해서는 해양사 자료 수집과 복원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해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무영 교수(문과대·한문학)는 사신들이 시문을 주고 받는 것을 순수하게 문학적 의미로만 볼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교수는 “물론 정치적 고려는 필요하며, 그 예는 조신과 안남국 사신과의 교류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양국 사신간의 만남이 대부분 우호적이었음에 비해 조신과 안남국 사신이 주고받은 서신은 매우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다. 이는 조신이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웠던 역관의 신분이라는 데 기인한다.


2시간 20분에 걸친 이번 발표회 내내 참석자들은 조선과 동남아시아간 교류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국학연구발표회 사상 가장 길고 활발한 문답이 오고 간 이번 토론회는 조선과 안남국 간 교류의 기억을 더듬어 우리나라의 대외관계를 되짚어 본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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