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다산(茶山) 정약용은 7세 때 지은 좥산좦이라는 시를 통해 임금에게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함을 경고했다. 이처럼 다산은 어려서부터 세상을 꿰뚫는 남다른 눈을 가졌다. 너무 비범해서일까. 그의 삶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굴곡을 그대로 담고 있다.

1762년(영조38년)에 태어나 1836년(헌종2년) 세상을 떠난 다산의 삶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벼슬살이를 하던 ‘득의의 시절’이다. 이 시기 다산은 암행어사를 거쳐 좌우부승지를 지내지만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면서 황해도 곡산부사로 강등된다. 백성의 삶에 더 가까워진 그는 당시 어린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홍역과 천연두에 관심을 가지고 의학서 좬마과회통』을 저술한다. 다산은 이 책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 및 전래 민간요법을 집대성했다.

2기는 귀양살이를 하던 ‘환난의 시절’이다. 정조 사후 포항, 강진을 거쳐 다산초당으로 이어진 그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이 시기의 대표 저서가 바로 『경세유표』(1817), 『목민심서』(1818) 등이다. 두 저서는 다산의 애민정신으로 빛난다. 『경세유표』의 한구절을 보자. ‘임진왜란 때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하였다.…이러하나 어찌 충신과 지사가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조선사회는 탐관오리들의 토지수탈과 ‘황구첨정’ 등 터무니없는 세금징수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다.

그는 『경세유표』를 통해 토지제도의 개혁, 조세제도의 합리화 등을 이야기하며 부패한 나라안 문제를 극복할 개혁안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기술발달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 등 실학사상을 이야기했다. 당시 조선에서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한 실학사상은 다산에 와서 그 토대가 세워졌다. 그는 형이상학적 관념으로부터의 귀추법에서 벗어나 현실의 구체적 현상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실사구시’의 선구자였다.

다산은 이(理)를 중시하던 성리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물질세계에 대해서도 정신세계 못지 않은 대등한 인격성과 가치를 부여했다. 『목민심서』는 목민관(牧民官)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다. ‘청렴이란 것은 수령이 지켜야 할 근본 요체이고, 모든 선의 원천이며 모든 덕의 근본이다. 따라서 청렴하지 않고 능히 수령 노릇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목민심서』중) 조선 후기 지방사회의 부패상과 민생문제를 철저히 ‘민(民)’의 입장에서 소상히 적고 있는 『목민심서』는 다산의 애민의식의 결정체라 볼 수 있다.

3기는 ‘유유자적의 시절’이다. 유배에서 풀린 후 귀향한 다산은 남은 생애동안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다. 그는 이순(耳順)의 나이에 자서전적 기록인 『자천묘지명』에서 60세까지 자신의 생애와 사상 및 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체를 빌어 사실대로 풀어냈다. ‘…부호들은 일년 내내 풍악 올려 즐기지만/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더구나/ 너나 나나 한 백성인데 어찌하여 후하고 박한거냐…’ ("애절양" 중)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연민은 결코 평탄치 못했던 다산의 삶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지배층의 시기와 박해로 묻혔었지만 “나의 학문은 백세가 되도록 기다리지 않아도 빛을 볼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처럼 오늘날 다산의 정신은 살아있는 고전으로 빛나고 있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