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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퓨전, 세계화 시대의 화두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이 말은 12세기에 살았던 성직자 성 빅토르 위고가 남긴 것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중세말에 살았던 한 지식인이 통찰한 진정한 세계인의 초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실로 작지 않다. 이 진술 안에는 세계화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현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를 규정해 온 삶의 조건에 지혜롭게 거리를 두는 것이자, 근대적 경계를 단숨에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세계화다.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사회생활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조화되는 것을 뜻한다.

이 재구조화는 경제적 영역뿐만 정치적, 문화적 영역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다. 게다가 세계화는 정보화를 자신의 날개로 삼아 속도를 배가하고 있다. ‘질주하는 세계(runaway world)’야말로 우리 시대의 징표다. 주목할 것은 이 세계화가 모순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를 이루는 중핵은 단일화, 미국화와 잡종화(hybridization)다. 경제, 정치,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미국적 표준이 우위는 점해가는 동시에 민족적 순수성을 대신해 다양한 퓨전들이 공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계화가 낳은 역설적인 풍경이다.

물론 대상에 따라 미국화와 잡종화 가운데 어느 하나가 두드러질 수 있다. 또 보는 시각에 따라 대상에 녹아 있는 어느 한 특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랩뮤직이다. 랩뮤직은 대중음악에서의 미국적 경향 강화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한국적 현실을 생생히 증거한다. 미국적 형식과 한국적 내용의 결합이 한국 랩뮤직의 본질이며, 바로 이 점이 이 음악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대중문화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세계화와 한 쌍을 이루는 정보사회의 도래는 미국화와 잡종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격이다. 인터넷으로 펼쳐지는 사이버 스페이스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산시키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잡종들, 즉 퓨전들이 숨쉰다. 민족주의가 분출하는 동시에 세계주의를 갈망하는 것이 오늘날 사이버 스페이스의 현주소이지 않은가.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퓨전은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배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단일성을 부정하고 다양성을 지지한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더니티를 일관하는 사유다. 문제는 이런 사유가 과잉화될 때 절대주의와 근본주의가 성행하게 되며, 그것에는 배제와 억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상대주의가 과잉화되는 게 물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근본주의의 폐해가 두드러지고,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유와 실천의 세계 안에 갇혀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상대주의적 사유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는 현재 우리사회가 직면한 중대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세계화가 가속화되면 될수록 단일화와 잡종화의 긴장은 강화될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세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세계주의, 민족주의, 잡종주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지구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창조적인 잡종주의 또는 퓨전의 정신과 실험을 자연스레 활성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차이를 승인하고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래전 성 빅토르 위고가 꿈꿨던 새로운 세계정신이다.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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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 (사회대·현대사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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