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대학에는 4개의 진료봉사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다. 필자는 의료인이라는 입장에만 익숙해져 사고가 굳어지는 것을 우려, 가입을 보류했지만, 편견에 앞서 직접 체험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해우회가 기획한 러시아진료봉사에 동행했다.

진료는 우스리스크, 아르젠예프, 스파스크, 미시간공장에서 이뤄졌다. 일사분란한 준비로 순식간에 작은 치과가 만들어졌다. 치과용의자는 여섯개, 보존(때우기), 치주(스케일링), 발치(뽑기)조에 각각 두개씩이다. 1개의 의자에는 조명보조가 1명, 진료보조가 1명, 술자 1명이 붙는다. 중앙소독 및 시술도구 준비에 2명, 20명의 인원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방문한 곳들이 진료의 혜택이 미비한 지방이라 하루 백명의 환자들이 끊임없이 진료소를 찾아왔다.

러시아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다. 주사맞기를 무서워하고 가끔은 기절하는 사람도 있다. 통제가 쉬운 환자가 있는 만큼, 얄미울 정도로 비협조적인 환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진료를 마친 환자가 우리를 돌아보며 ‘스파씨~바(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할 때면 온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씻겨나가듯 경쾌한 기분이 든다. 러시아의 백야와 함께 이어진 야간진료는 새벽 한시가 넘어서야 종료됐다. 구슬땀과 때가 탄 진료복들, 하루새 구두위에 쌓인 먼지조차도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이다. 서로의 어깨를 주무르며 격려하고, 살며시 미소를 머금는다.

봉사라는 것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후진국보다는 풍족한 선진국에서 활발한 것을 보면, 봉사는 삶의 잉여분에서 탄생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봉사의 일반적인 의미를 떠나, 현사회에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봉사는 남을 돕는 시혜적인 의미에서 남과 함께 하는 연대의 의미까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진료봉사활동을 망설였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의료인이라는 직업은 단순히 역할의 분담만을 의미하지 않고, 소득에 따른 격차와 알량한 전근대적인 계급의식까지 물려받아, 상위의 계급성을 지니고 있다. 환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치료한다는 말은 쉽지만, 잘 이뤄지지는 않는다. 환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료를 일방적으로 베푼다고만 생각하는 이들은 환자에게 배울 점이 얼마나 많은가를 망각한다. 결국 일방적인 봉사활동은 삶의 여유를 환원하는 Noblesse Oblige가 된다. 우려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진료에 임한 우리들은 그곳에 계신 분들로부터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도움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연대에 대한 자각보다는 우리가 너무도 부족했기에 가능했던 경험이었지만 유익한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러시아에서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통역과 숙소, 식사를 제공해주신 현지 주민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분들께 감사의 표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진료할 때 마주쳤던 이들의 눈에서 사람이 믿음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눈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야겠다.

/김범준(치의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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