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이 사회는 또 다시 무엇을 잊고 있는가"

▲영화 『살인의 추억』은 지난 1986년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해 화제가 됐다. 영화 속 범인은 비 오는 밤, 으슥한 길을 혼자 지나는 여성들을 범행대상으로 골라 잔인한 수법으로 그녀들을 살해한다. 영화와 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재현된 살인의 잔혹한 흔적과 공포의 전율은 당시 사건이 몰고 온 충격과 분노를 짐작케 한다. 마치 오래된 앨범 속의 남겨진 사진을 보며, 잊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얼마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사건은 영화가 아닌 현실을 통해 끔찍한 범죄의 추억을 곱씹게 했다. 11개월간 약 20여명을 살해한 범인은 자신의 엽기적인 범행 내용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자백했고, 수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의 범죄 행각에 사회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범인의 범행 동기는 부유층과 여성을 향한 적개심이었다고 한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 위로 드러난 그의 눈빛에서는 살인에 대한 반성과 후회보다, 사회를 향한 냉소와 증오를 더욱 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공포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증오와 원한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희대의 사건이라 분류되는 끔찍한 범죄의 드러난 범인들은 대부분 사회의 소외 계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거듭된 거부와 배제의 경험이 삶에 대한 절망과 세상을 향한 미움을 증폭시킨 것이다. 억눌린 분노의 분출구로써 그들은 극단적인 살인을 선택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범죄는 어떠한 설명으로도 면죄될 수 없지만, 그들의 삶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간 책임은 비단 범죄자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닐 것이다.

▲이번 연쇄살인사건을 지켜보며 누구보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사람은 범인과 이웃해 살고 있던 인근 주민들이었다. "같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어 지나가다 가끔씩 마주치긴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몰랐다"는 이웃 주민의 말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11개월 동안 엽기적인 살인 행각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사건 보도가 나간 후에야 아들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도 "우리 아들은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라며 고통스런 눈물을 쏟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상처받은 삶을 구원해줄 수 있던 사람들조차 그에겐 고립이란 장막 밖의 타인이었던 것이다. 유형, 무형의 형태로 그의 삶의 재단했을 사회는 또 어떠한가. 가정의 결손과 가난, 낮은 학력과 전과 등의 이유로 그는 온갖 편견과 질타의 굴레 속에 살았야만 했다.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대다수 사람들은 범인의 비틀어진 내면과 끔찍한 범죄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증오한다던 '잘 사는 사람들'과 '나쁜 여자들'은 어쩌면 내 안에도 잠재돼 있을, 나와 다른 타인을 향한 지나친 편견과 속물적 잣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이 사회의 얼굴 없는 가해가 계속될수록, 그 안에서 좌절하는 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살인의 추억'은 되풀이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잔혹한 살인 뒤에 감춰져 있는 본질적 가해에 대한 '망각의 추억' 역시 되풀이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희대의 살인사건을 바라보는 당신과 이 사회는 또 다시 무엇을 잊고 있는가. 우리 기억 속 '망각의 추억'은 언제까지 지속돼야 하는가.

/김보연 학술부장 hemion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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