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밀레니얼이 SF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나는 과학자들, 과거나 미래를 오가는 시간여행, 로봇과 인간이 공존 또는 대립하는 사회. SF 장르라 하면 으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다. 책, 영화를 불문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SF 장르는 오랜 기간 사랑받아 왔다. 그런데 최근 한국 문학계의 SF 장르는 이전과 다른 대상에 주목한다.

 

▶▶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은 소수자를 드러내며 기존 SF 장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SF라는 관성

 

SF 장르는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가상의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하지만 현실의 과학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무제한으로 상상이 가능한 판타지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과학적 상상력’은 SF를 정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과학적 상상력은 SF를 과학의 영역에 두면서도 현실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도록 한다. 

한편 지금까지 과학이라는 세계는 남성의 언어로 정립돼 왔다. 공학은 남학생에게 어울린다는 편견은 여전하며, 여성 과학자들이 겪는 어려움 또한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SF 장르 역시 오랜 기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SF 장르의 시초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대개 1818년에 쓰인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그 시작으로 여겨진다. 직류 전기를 쏘면 인체 근육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착안해 탄생한 부활이라는 소재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첫 번째 출간에서는 그의 남편인 퍼시 셸리가 서문을 썼다. 그렇다 보니 초기에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남편의 작품으로 오인 받았다. 첫 판에서 책은 기괴한 소재에 대한 불편한 반응과 문학성에 대한 좋은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이와 달리 두 번째 판에서 작가가 여성임이 밝혀지자 작품의 여성성에 대한 혹평이 주를 이뤘다.

프랑켄슈타인의 출간 이후 약 200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타워즈』, 『매트릭스』, 『백투더퓨처』 등 대형 할리우드 SF 영화 중에는 남성 관객을 겨냥한 시리즈물들이 많았다.

이처럼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 문학으로 특정한 고정 독자층을 갖는 SF는 점차 고정된 문법을 형성해나갔다. 기존 SF에 자주 등장한 기술 발전에서 비롯된 거시적인 윤리·정치적 문제, 기계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미래 등은 지금까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주제들이다.

 

미래에서 오늘로
그들에서 우리로

 

최근 한국 문학에서 SF 장르는 기존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첨단 과학 기술을 갖게 된 인류의 모습을 그리지만,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겪는 사회 문제를 다룬다.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미래에서 현재로, 주류에서 비주류로 이동한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이 시대를 ‘신경증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끝없는 경쟁의 시대에 성과주체는 능력에 대한 무한 긍정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소진시킨다. 현재의 효율적인 목표 달성이 지향점으로 극대화된 미래 사회에서는 모두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달려간다. 이 속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들은 결함이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은 효율 극대화의 관점에서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존재를 들여다본다. 책은 로봇이 인간을 대신해 위험한 일을 하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잘못 설계된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와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 투데이, 아버지를 잃은 소녀 연재와 장애를 가진 언니 은혜가 등장인물로 나온다. 콜리는 쓸모없어진 투데이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며 정상의 범주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정상에서 벗어난 각각의 인물들은 연대하며 나름의 ‘쓸모’를 찾아간다. 기존에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성이나 환경 문제를 다루는 SF 소설도 있다. 지난 2019년 출간돼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한 작품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중년의 비혼모 과학자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의 시선을 담아낸다. 이외에도 정세랑의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 중 「리셋」은 문명이 ‘리셋’된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내용으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운다. 이 작품들은 기술이 극대화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회·철학적 문제를 그리는 기존의 SF적 접근 방식을 변주한다. 지금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내보일 수 있는 소재로서 과학 기술을 차용하는 것이다.

 

SF로 그리는 밀레니얼의 가치

 

미국 문학 연구자 엘리스 헬포드는 논문에서 『바벨-17』 등을 쓴 새뮤얼 딜레이니의 말을 인용하며 SF가 소수자를 표현하기에 용이함을 이야기했다. 헬포드에 따르면 서양 문학의 기본 서사구조에서는 주로 백인 비장애인 남성이 세상에 나아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진실을 발견한다. 이런 구조 안에서 비남성, 장애인, 어린이, 비인간 동물 등 여러 존재들의 이야기는 주변부로 밀려난다. 반면 SF는 장르 특성 자체가 새로운 세계, 지금과는 다른 존재 방식을 중시한다. 따라서 굳어진 기본 서사를 파괴하고 전혀 다른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용이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가치에 반응한다. 최근 SF 소설이 보여주는 고정된 정상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모습은 밀레니얼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 SF는 기존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새로운 질서로 써 내려가기에, 상상하던 가치를 현실로 옮겨오고자 하는 밀레니얼들의 움직임과 결을 같이 한다.

특히 2010년대 이후 한국 SF 소설들을 소비하는 20, 30대 여성이 많이 늘어났다. 이들은 김초엽, 정세랑 같은 SF 작가들의 큰 팬덤을 형성한다. 지난 2020년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과학소설을 구매한 20대 여성이 1999년~2009년 1.4%에서 2010~2019년 12.6%로 늘었고, 30대 여성도 11.1%에서 18.2%로 늘었다. 현실적인 제약으로 일상에서 억눌림을 느끼는 여성들은 SF가 그려내는 편견 없는 세상에 매력을 느낀다.

전문가는 여성을 포함한 밀레니얼 세대들이 겪어온 사회의 단면이 SF 소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SF 작가이기도 한 정보라 교수(문과대·20세기노문학)는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타인에 더 공감하고 이를 표현하는 여성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더 섬세하게 의사소통하는 훈련이 돼있다”며 “따라서 새로운 존재 방식과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더 호응하고 열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밀레니얼 세대는 다양한 매체와 기술을 접해왔기 때문에 장르와 관계없이 재미있는 작품에 개방적이고 좋은 이야기를 골라내는 감각이 뛰어나다”며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SF가 관심받는 이유를 설명했다.

관념에 머무는 신념은 자칫 피로감을 주기 쉽다. 이념과 삶 사이에서 불일치를 느끼는 사람들은 ‘미래는 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표현에 지친다. 반면 SF는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가치를 새로운 세계 속 구체화된 현실로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정세랑 작가는 인터뷰에서 ‘세계를 1mm라도 나은 세계로 당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SF를 쓴다’고 말하기도 했다. SF 소설을 통해 현실과는 먼 상상 속에서만 그려졌던 가치적 이상에 구체적으로 다가가는 과정은 독자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SF의 고전이라고 여겨지는 『유토피아』나 『1984』 같은 작품은 동시대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새로운 현실을 전망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SF는 과학적 상상력을 무기로 우리가 그리던 미래에 더 가까이 데려다준다. 그리고 독자는 그 미래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갈증을 해소한다.

 

글 김민정 기자
bodo_elsa@yonsei.ac.kr

<자료사진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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