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주 보도부장 (국제관계·19)

사람마다 생각하는 ‘책임’의 의미와 정의는 다르다. 또 상황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렇지만 내가 느낀 ‘책임’은 ‘희생’이었다.

대부분의 기자는 우리신문사에서 수많은 취재와 현장을 경험하면서 내적 성장을 이루기도 하고 형용할 수 없는 가치를 깨닫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었고 현재도 그렇다. 하지만 나의 짧은 기자 생활에서 ‘책임에서 비롯된 희생’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신문사에 입사한 지 4학기째, 두 명의 동료 기자의 퇴사를 겪었다. 동료 기자의 퇴사는 단순히 업무 증가가 아니다. 한배를 탄 동료의 갑작스러운 탈선은 심적으로 큰 공백이 된다. 그 탈선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퇴사를 결정하는 기자는 죄책감에 티를 낼 수도 없고,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한다. 부서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남은 기자들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취재를 준비해야 했다.

첫 번째 기자의 퇴사는 나에게 죄책감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미안하다”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남겨진 기자 중 한 명은 동료의 퇴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기자는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사로 발생한 공백은 내가 절대 채우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기사 한두 개 정도 더 쓰는 거였다. 

부장이 된 후 두 번째 기자의 퇴사 소식은 나에게 두려움이었다. 기자들에게 알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들었을 때 느끼는 좌절과 허탈함을 너무 잘 알기에 기자들에게 동료의 퇴사를 알리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예년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겪는 동료의 퇴사는 역시나 기자에게 더 타격이었다. 나는 우는 기자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퇴사하는 기자들은 각자의 사정과 이유로 떠났다. 사람의 생각과 상황은 모두 다르기에 또 각자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기에 퇴사 이유를 매도할 순 없다. 혹은 실제로 조직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임이라는 명목하에 개인사는 제쳐 두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기자도 있다. 

두 번의 퇴사를 겪으면서 위험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결국 남겨진 사람들은 피해자인가?” 잘못된 생각이었다. 남겨진 사람들은 피해자가 아닌 「연세춘추」를 영위시키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신문사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든 이러한 위기,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의 단체를 영위시킨다. 이러한 영위자들은 과거의 우리신문사에도 있었을 것이고, 한 단체, 한 사회에도 있었을 것이다. 


책임에서 비롯된 희생은 참 눈물겹다. 하지만 또 대단하다. 하나의 부서, 그리고 신문사 전체, 나아가 한 사회를 영위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희생을 높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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