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집』을 통해 살펴본 노동 현실의 어제와 오늘

“나는 지난 36년간 유령이었습니다.”

지난 7일, 한진중공업 부당해고 노동자 김진숙 씨가 한 달에 걸친 도보 행진을 마치고 외친 첫마디다. 노동조합 선전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그는 36년째 복직 투쟁 중이다. 그에게 노동은 어떠한 의미길래 그토록 복직을 원하는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기자는 방현석 작가의 『내일을 여는 집』(창비, 1991)을 길잡이 삼아 인천남동공단과 달동네 근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권리를 외친 대가
은밀한 사회적 죽음

 

없이 살아도 그런대로 오순도순했던 성만의 집안에 풍파가 몰아친 것은
회식 사건이 터지면서부터였다. 물론 성만으로서도 자신이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내쫓기리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자는 주인공 성만이 30년 전 다녔을 남동공단 어귀를 찾았다. 매캐한 기름 냄새가 기자를 반겼다. 현장에는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바쁘게 거닐고 있었다. 대다수가 외국인 노동자였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중공업은 사양산업으로 내몰렸다. 소설 속 왁자한 모습과 달리 공단 일대는 비교적 한산해 보였다.

 

▶▶성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향했을 인천 남동공단은 현재 당시만큼 바쁜 인부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줄지어 있는 공장들과 공사 현장이 눈에 띈다.

 

누군가에게는 기피 장소인 이곳은 누군가에게 삶의 터전이 된다. 스스로 ‘A급 선반공’이라고 자부했던 성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하지만 그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건 하루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극은 여태껏 회사가 월급에서 공제한 10만 원을 임원들의 회식 비용으로 유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회비 환급과 노조 집행부 불신임을 요구했고, 성만이 총대를 멨다. 회사는 이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측은 주동 세력을 파악하자마자 태도를 바꾼다. 가담자 전원을 해고한 것이다.

 

다시 해고자들이 모였다. 사장실을 점거하기로 결정한 것은
달리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 나오는 데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직 투쟁 과정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성만과 해고자들은 물리적 폭행까지 감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회사 구성원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사측은 노동운동 세력을 철저히 고립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해고자 복직에 동조하는 여론이 일자, 개별 보너스 지급으로 분위기를 교묘히 반전시켰다. 누구 하나 해고자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사측의 노조 와해 공작, 생계 위협, 손해배상소송 협박 등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조합원의 이야기가 하루를 멀다 하고 신문에 실린다.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으로 내모는 ‘칼 없는 살해’는 3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합법’이다.

 

부당하고 억울해도
그들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어쩌다 길거리에서 다이아몬드 마크의 푸른 작업복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사람들, 피로에 지친 몸을 만원 버스에 싣고
퇴근하는 사람들만큼 성만에게 부러운 사람들은 없었다.

 

공장 단지를 나와 성만의 집이 있던 송림동 일대로 향했다. 성만이 출퇴근을 위해 이용하던 16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퇴근 버스에서 내리는 노동자들을 가장 부러워하던 성만의 마음을 떠올려 봤다. 10년 넘게 일한 자신을 단숨에 쫓아내고, 월급을 유용하고, 상해까지 입힌 회사였다. 그런데도 성만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직장을 잃은 성만의 눈에는 부러워 보였을 버스를 타는 노동자들. 그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지만, 지나가는 16번 버스를 보며 성만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사과장님 계십니까. 대성중공업에 재직했던 종업원이 여기 면접 보러 왔길래, 협조 좀 얻을까 해서요.” … “아 그 친구, 나가서까지 귀찮게 구는구먼.” 금테안경의 짜증스러워하는 모습이 목소리를 타고 왔다. “성실하냐고요, 이 사람이 지금 누구 놀리는 거요? 회사 말아먹으려다 해고됐다면 알조 아니오.”

 

사실 성만과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이들은 처음에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인근 공단에는 이미 이들에 대한 ‘경계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좁은 동종업계에서 노동운동으로 인한 퇴출은 재취업 기회의 박탈을 뜻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어 내쫓고, 뒤에서는 이들에게 딱지를 붙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실히 일하고 정당하게 그 몫을 받고자 했을 뿐이었던 성만과 해고자들은 준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사회로부터 외면받았다.

어디서도 일할 수 없다는 공포는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고되지만 제 일에 만족하며 살아왔던 성만은 실직 상태에서 큰 무력감을 느낀다. 노동자에게 실업은 단순한 직장의 상실이 아니다. 실업은 곧 사회적, 경제적 죽음을 의미한다.

 

“당신이 아무 데나 취직해서 못 다닌다는 건 이미 확인됐잖아요.
당신, 복직 포기하고 다른 데 가서 버텨내지 못한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아요. 당신이 복직할 때까지만 다닐게요.”

 

해고의 그림자는 가족에게까지 드리웠다. 성만의 아내는 다시 봉제 공장에 나가야 했고, 아이들은 유아원에 맡겨졌다. 밤 10시가 넘어야 파김치가 돼 집에 돌아오는 아내를 위해 성만은 김치찌개에 김칫국을 나란히 내줘야 했다. 몇천 원이 아쉬워 아내가 좋아하는 해물잡탕 한 번 끓여주지 못했다. 가족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성만은 자신을 원망한다. 복직 투쟁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성만과 해고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였다.

 

삼십 년의 세월
노동 현실은 얼마나 변했나

 

버스를 타고 성만이 살던 송림동 일대로 향했다. 퇴근하는 아내를 마중 나가던 성만의 발자취를 좇아 송림동 일대를 둘러봤다. 늦은 밤 그가 배회하던 달동네 비탈길은 매끄러운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했다. 지난 2017년 재개발이 진행된 송림동 달동네에는 허름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높은 아파트가 즐비했다. 성만과 가족들이 몸을 누였던 월세 단칸방은 이제 달동네 박물관에 역사로 남게 됐다.

 

▶▶송림동이 4년 전 재개발로 높은 건물들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면서 성만이 살던 개발되지 않은 달동네는 이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남아있다.

 

낡고 허름했던 달동네는 빌딩 숲으로 탈바꿈했지만, 성만 가족이 겪었던 해고의 아픔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로 남아있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는 궁지에 내몰린 채 추위와 싸우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노동조합을 결성한 LG 트윈타워 청소노동자 80명이 집단해고 사태를 겪었다. 한편 지난 2020년 10월에는 용역 직원들이 공무원들로부터 부당 업무 지시, 언어폭력, 노조 결성 방해 등의 ‘갑질’을 당했다. 이들은 성만이 그러했듯 언제나 ‘을’의 입장이며, 문제가 생기면 대체 가능한 인력 정도로 여겨진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 중인 것이다.

 

날이 밝자 해고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해고자협의회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짰다.
여기서 물러서면 병신 된 몸만 남을 뿐이라는 데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다시, 아니 끝까지 회사와 싸우기로 했다.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계속되는 성만과 동료들의 투쟁에 여론은 술렁이고, 결국 해고된 전 인원은 복직에 성공한다. 그러나 현실은 소설만큼 녹록지 않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송림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용노동부 인천고용센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늘날에도 갈 곳을 잃은 많은 노동자가 걸음하고 있었다.

 

▶▶성만과 같은 노동자들이 찾을 인천고용복지센터 옆에는 ‘해고 산재’ ‘임금 체불’ 등의 글자가 박힌 노동법률사무소와 상담소가 즐비해 있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부분 소박하다. “계속 일하게 해달라”, “최저임금을 보장하라” 등 당연한 권리들이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들에게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해야 얻어낼 수 있는 성취다.

 

지금쯤 성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노동자로서 정년을 보장받고 은퇴했을까. 아직은 그 답을 확신할 수 없는 세상이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씨는 책 속 성만과 비슷한 시기 즈음 해고됐지만, 아직도 돌아갈 일터를 찾지 못했다. 부당해고 노동자의 아픔이 더는 반복되지 않도록, 그 변화의 물꼬를 기대한다.

 

글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사진 김다영 기자
dy3835@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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