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읽어왔던 소위 ‘고전’들은 정말 ‘고전’이 되지 못한 다른 작품들보다 월등히 좋은 문학성과 내용, 교훈을 담고 있어서 선정된 것일까. 구조주의는 여기에 대해 아니라고 답한다.

 

 

구조주의,
사회는 하나의 감옥이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Truman)은 자신의 모든 삶을 생중계하는 프로그램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는 이런 프로그램 속에서 사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세트장이며, 직장 동료, 친구 심지어 부모님과 아내까지 연기자라는 것을 모른 채 30년을 살아간다. 그의 모든 삶은 다른 사람에 의해 가공된 것이다.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트루먼에게 물 공포증을 일으켜, 트루먼을 기획자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이용한다.

구조주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트루먼 쇼』와 같다. 트루먼에게 트라우마를 내재화시킨 것처럼 개인의 인식이나 행위를 규정하는 구조와 체계가 존재한다고 구조주의자들은 말한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사회 구조와 권력이 만들어낸 일종의 계산된 결과라는 의미이다.

대표적인 구조주의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런 사회 구조와 권력에 대해서 표준어를 예시로 들며 설명한다. 표준어는 사회 구조와 권력이 정의한 이성적인 말로서, 담론에서 올바른 언어와 잘못된 언어를 규정하여 잘못된 언어를 금지하거나 허위로 단죄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구별의 규율이 학교 등의 교육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학교와 감옥을 동일 선상에서 보면서 교육과 훈육을 통해서 사람들은 지배적 담론이 추구하는 가치를 내재화하게 된다고 봤다. 교육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 구조와 권력이 정한 결과값대로 자신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통제성을 추구하는 사회는 한 명의 권력자가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일종의 판옵티콘 감옥이라고 말한다. 효율적인 감옥 안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권력이 추구하는 담론 가치를 지키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대중들은 판옵티콘적 감시 체제 속에 살고 있으며, 모든 행동과 의식은 획일적인 하나의 주체 형성만이 남게 됐다는 것이다.

 

 

권력구조의 선택, 『춘향전』과 『심청전』
 

구조주의 관점에서 고전은 다른 작품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다. 고전은 그 자체로 권력이 선택한 결과물이며, 사회구조의 반영물인 것이다. 판옵티콘 감시 체제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책의 저자이면서 책의 독자이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다.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춘향전』은 사회 구조가 고전을 어떻게 선택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춘향전』은 아동 필독서로 지정될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춘향전』을 읽고 이에 대해 배우면서 성춘향과 이몽룡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전달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춘향전』이란 신분을 뛰어넘는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춘향전』은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집필된 소설이 아니다. 『춘향전』은 엄연히 성인용 소설이다. 당시 『춘향전』과 이본 내용을 살펴보면 『춘향전』에 상당히 자극적인 부분이 많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몸과 성행위에 대한 노골적이고 수위 높은 묘사는 『춘향전』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름답고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우리는 『춘향전』에서 사회구조가 발췌한 부분만을 소비하고 또 기억하는 것이다.

고전은 소비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창작의 과정에서도 사회구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또 하나의 고전인 『심청전』은 사회구조의 반영이 잘 드러나는 예시다. 『심청전』은 과연 우리가 고전으로 어려서부터 읽고 배울 만큼 교육적일까? 소설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인신매매를 선택하는 자식의 모습을 효의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심청전』은 아버지의 빚이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적인 이야기의 내용인 셈이다. 이런 주제의식은 당시 효가 최우선시 되는 사회 가치관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이다. 효라는 가치관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그대로 내포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우린 이렇게 잔인한 장면을 당연하게도 긍정적인 장면으로 여기며 자라왔다. 우리 속에 내재돼있는 사회적 구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심청전』은 이런 가치관이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전승되고, 확산되는 일종의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기존 사회 권력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타인에게 내재화되고, 다시 획일화된 가치관이 재생산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고전은 권력의 구조 아래서 창작되며 가치관의 재생산을 통해 또 다른 창작물을 권력의 구조 속으로 편입시킨다.

 

세트장 밖에서 바라보기

 

푸코와 구조주의가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권력에 의한 판옵티콘 감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대로 행동하고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교육을 통해서 전승받은 획일성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판옵티콘의 죄수로 남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권력의 비참함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한 맥락처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가 어떤 정치적 아젠다를 거쳐 만들어진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또 그 정치적 아젠다 바깥에서 사회를 통찰하고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바로 이것이 “어떤 권력도 통제하지 못하는 혁명”이며 “억누를 수 없는 밝음과 기쁨”이라고 말한다. 한 명의 죄수로서 판옵티콘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구조를 파악하고, 통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고전에서도 마찬가지다.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점, 혹은 오랫동안 인정받았다는 점은 고전 선별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고전을 접할 때도 이런 내용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리 잡게 됐는지, 우린 얼마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당시 어떤 구조가 이런 고전을 만들었나,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선택됐나, 권력은 이 고전을 선택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고전을 통해서 그 이면의 사회를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고전을 읽는 독자에서 고전을 사회 권력의 부산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세는 고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고전을 하나의 문학작품 이상의 것으로 바라본다면 고전은 더 이상 하나의 좋은 문학에 그치지 않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아젠다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이 역사적 사료로서, 그리고 사회 권력의 메신저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고전은 사회구조에 의해서 선택되고 만들어진 권력의 생산물이다. 우리 세트장 속 트루먼들은 세트장을 넘어선 사회 권력에 대한 열린 시각을 통해 고전과 사회를 새롭게 인지함으로써 수동적인 죄수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자신 속에 내재돼 있는 사회 구조에서 탈피해 고전을 살펴보게 되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의미로써의 ‘고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글 이지훈 기자
bodo_wonbin@yonsei.ac.kr

<자료사진 디베이팅 데이 Yes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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