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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정재현 교수 (연합신학대학원·종교철학)
  • 승인 2020.11.16 03:33
  • 호수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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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교수
(연합신학대학원·종교철학)

한 해를 송두리째 도둑맞은 듯한 2020년도 어느덧 저물어 간다. 첨단과학과 의학의 혜택을 이전 어느 시대보다 더 크게 누려온 오늘날의 인류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생명과 건강에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다. 지구를 장악하고 우주로 날아갈 것 같았던 인간은 어처구니없게도 한갓 미물에게 포로가 된 듯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아래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시대를 나눠야 할 거라고 예견한다. 경제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삶의 방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이 어떤 연유로든 생태 환경과 무관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남북극 동토에 묶여 있던 인류 출현 이전의 바이러스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든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최근 20년 사이에는 잠들어 있던 수 만년 전 미생물이 연구실에서 소생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어떤 흉측한 괴물이 돼 다시 인간을 공격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더욱이 우리 몸 안에 서식하는 박테리아 중 아직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들이 돌연변이에 의해 어떻게 돌변할지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지구는 고사하고 우리 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다.

실제 코로나19만 하더라도 백신 개발 이야기가 최근에 나오기는 하지만 종국의 해결책이라는 치료제와 예방 백신을 언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각자가 주의해야 한다지만 감염된 지도 모르는 무증상 보균자가 적지 않다. 더욱 가공할 일은 앞으로 예측을 불허하는 ‘신종’의 출현이 더욱 빈번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다. 그러니 지금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와 예방제가 궁극적인 해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없음’과 ‘모름’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기실 우리는 ‘앎’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왔다. 삶을 ‘앎’으로 추리고 삶을 이루고 있는 ‘있음’을 잘 붙잡아 더 크게 만들면 더 좋은 삶이 될 줄로 알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미증유의 사태는 ‘있음’에 비해 ‘없음’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모름’에 비해 우리 ‘앎’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덮어버리고 잊어버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죽음의 그림자 같은 ‘없음’과 ‘모름’을 외면한 채, ‘있음’과 ‘앎’만으로 삶을 엮으려 했던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자가당착인지가 전율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모름’에 대해 보다 진솔해야 하지 않을까. ‘앎’을 좀 더 늘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 알고 있었던 ‘모름’도 있고 아직 알지 못한 ‘모름’도 있지만 아예 알 수 없는 ‘모름’도 있다. 삶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그런 ‘모름’의 뜻을 새기면서 ‘없음’에 대해 새삼스레 조신해야 할 일이다. 결국 ‘없음’과 ‘모름’을 더듬음으로써 지금 살아가는 삶을 보다 더 찬찬히 그리고 더 촉촉하게 살아갈 길을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달리기만 할 일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오랜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의 시 첫 구절이다. 그러나 과연 삶이 우리를 속이던가? 삶이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데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닐까? 게다가 그런 불일치의 책임이 사실 삶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앎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내가 어찌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고 있으니 속이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다만 이미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삶에서 앎이 나름대로 쪼가리를 추려보는데, 이것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삶에 대해 수시로 어긋나니 애꿎게 삶이 속인다고 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삶을 어찌해보려다가 여의치 않으니 질러본 앎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삶이 속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속는가? 앎이 속이고 앎이 속는다. 그래서 자기모순이고 자가당착이다. 그런데 이게 앎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삶으로 봐야 비로소 힐끗 보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과 앎 사이의 어디에 걸쳐 있는가? 속이는 앎과 속지 않는 삶 사이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고 누구인가? 앎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없음과 모름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제 이 물음으로 삶의 매 순간을 조근하게 밟아가는 지혜의 길을 더듬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정재현 교수 (연합신학대학원·종교철학)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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