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소정 사회부장 (영문·19)

칼바람이 살을 에기 시작한다는 것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의미다. 올해는 수능이 12월로 미뤄졌지만 대대로 11월이야말로 수능의 달이었다. 크리스마스나 명절 같은 설렘도, 매달 있는 공휴일조차 없는 무채색의 11월에 수능은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예정돼있다. 나는 2018년 11월에 수능을 치렀다. 2년이 지나도 그때의 기억은 쉽사리 잊히지 않고 매년 11월이 되면 ‘아, 누군가의 밤은 참 길겠구나’, 마음이 동하고 만다.

마음을 졸이고 있을 이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으나, 긴장을 덜 수 있는 비법 같은 건 잘 모르겠다. 나는 수능 보기 1년 전부터 떨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한 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어두웠다. 수능 점수를 올려준다고 해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참을 수 없이 거북한 기분이 든다. 매시간 일거수일투족을 속박당했다. 야간자율학습 3시간을 비롯한 각종 자습시간에는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쓰리아웃’ 제도를 만들어 면학 분위기를 위한 규칙을 세 번 이상 어기면 야자에서 퇴출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퇴출이라니! 나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외부의 속박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면으로부터의 통제였다. 나는 행동뿐 아니라 사고까지, 모든 것을 입시에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가려내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부담되는 감정, 집중이 잘 안 되는 몸 상태 등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입시에 맞춰 나라는 인간을 재건축하려 들었다. 자기 불신은 마음을 갉아먹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이로만 느끼게 합니다. …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故 신영복 교수는 여름의 감옥 생활이 겨울보다 괴로운 이유는 옆 사람과 서로 증오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같은 이유로 괴로웠다. 불안감은 옆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 공부에 집중할 수 없도록 했다. 옆 사람이 다리를 떠는 것, 책장을 넘기는 것 등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신경에 거슬렸다. 입시라는 통제와 경쟁 상황에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은 옆 사람의 존재에 대한 미움으로 번지고, 미움을 간직한 내면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유일한 위안은 졸업이었다. 모두가 “대학에 가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위안으로 생각하면서도, 대학에 갔다고 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모두가 대학생이 돼서 지금의 어려움을 잊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2년이 흐른 지금은, 수능을 보면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 체념하는 것은 아닐까 감히 생각한다. 철저히 개인의 능력과 실적에 따라 가치 평가당하는 성과주의 사회에서 자아의 존엄함은 파편화되고, 불안은 절실할 때마다 닥쳐오며, 옆 사람을 순수한 마음으로 위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수능은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맞는 일종의 예방접종은 아닐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수록, 그 생각이 과연 진실인지 찬찬히 되짚어봐야 한다. 수능을 거친 우리는 어떤 어른이 됐는가. 모두가 힘들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힘들 것을 강요하는 어른으로 자라지는 않았는가. 모두가 힘든 사회를 용인하고,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어른이 되지 않았는가. 수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곧 치르게 될 이들이 너무 힘들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수능이 올 때까지 ‘수능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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