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은명의 발자취를 따라서

‘상계동 슈바이처’라 불린 은명내과 김경희 원장(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의학·40)이 지난 10월 22일 향년 10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43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생을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했다. 그가 남긴 베풂의 흔적을 돌아보기 위해 그가 평생을 몸담으며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준 상계동 일대로 향했다.

 

▶▶삼선교 쪽방촌은 성인 여자 평균 신장의 기자가 고개를 숙여서 갈만큼 높이가 낮았다.

 

의술(醫術)을 넘어 인술(仁術)로
 

김 원장은 1941년 서울 답십리 조선보육원 아이들을 치료한 것을 시작으로, 광복 후에 귀환 동포를 무료로 진료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일본 교토대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지난 1972년부터 약 10년 동안 김 원장은 상계동, 신림동, 청계천 일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진행했다. 

삼선교 근방의 낡은 쪽방촌. 길 건너편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 것과 대조되는 이곳엔 머리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낮은 판잣집들이 가득 있었다. 김 원장은 서울을 비롯해 영세민과 피란민들이 뒤엉켜 살던 전국의 쪽방촌을 돌며 무료 진료를 했다.

이후 김 원장은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인술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여러 빈민촌을 돌아다닌 결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중계동에 터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병원을 차릴 만한 집을 찾지 못해 지난 1984년 비교적 가까운 상계동에서 부모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은명’이란 이름으로 내과를 개업했다. 무료로 의술을 베풀고자 했던 김 원장은 뜻밖의 반대에 부딪혔다. 환자들이 “누굴 거지로 아느냐”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환자들에게 가난보다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더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 원장은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함께 보듬어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1천 원만 받고 진료를 보는 ‘은명가족진료’라는 제도다. 아직 직장의료보험밖에 시행되지 않던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때부터 김 원장은 ‘상계동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김 원장의 ‘천 원 진료’는 지역의료보험이 정착된 1989년까지 이어졌다.

 

▶▶김 원장의 은명 내과가 있었던 건물은 현재 민간 한의원이 위치해있다.

 

장학, 기부, 공동체까지
끊이지 않는 은명의 손길

 

김 원장의 사랑은 의료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 1985년 은명장학회를 설립해 약 2천 명의 학생을 지원했으며 1996년에는 병원과 거주할 집만을 남기고 그 외의 53억 원 규모의 재산을 우리대학교와 의료원에 기부했다. 또한 2000년에는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아래 백사마을)와 상계1동 노원마을의 100가구를 묶어 ‘은명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주로 독거노인들로 구성된 영세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구성해 직접 그들의 건강과 생활, 경조사들을 챙겼다. 매년 버스를 빌려 소풍도 가고, 텔레비전 수리 등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마을 식구들의 보호자였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은명마을의 흔적은 많지 않다. 수락산 아래 노원마을은 2000년대 후반 재개발이 진행돼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백사마을 역시 2019년 재개발이 확정돼 지금은 이미 대부분의 주민이 마을을 떠났다. 기자가 백사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쓸쓸한 벽화와 폐가만이 반겨줄 뿐이었다.

 

▶▶주택재개발 정비 사업으로인해 백사마을의 건축물은 대부분 공가다.

 

평생 영세민들의 건강을 보살피던 김 원장은 본인의 건강이 악화하는 것을 느꼈다. 심장질환을 앓던 김 원장은 은명내과를 이어갈 후계자를 찾지 못해 지난 2004년 12월 24일 폐업 신고서를 제출했고, 결국에는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남을 위해 베풀던 김 원장의 이름은 현재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은명 대강당’이라는 이름으로 작게나마 남게 됐다. 

 

 

 


글 김수영 기자
bodo_inssa@yonsei.ac.kr
정희원 기자
bodo_dambi@yonsei.ac.kr

사진 박민진 기자
katarin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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