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사회부장 (경제·18)

영화 『인사이드아웃』은 어른들을 울리는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하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은 각각 기쁨과 슬픔을 형상화한 ‘기쁨이’와 ‘슬픔이’다. 초반에 슬픔이는 언제나 우울한 모습으로 기쁨이와 관객들을 답답하게 한다. 슬픔이가 행복을 방해한다고 믿는 기쁨이는 분필로 큰 원을 그려 슬픔이에게 그 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기쁨이는 삶의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슬픔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때로 우리 삶을 끌어안는 건 기쁨이 아닌 슬픔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영화를 보고 정호승 시인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가 떠올랐다. 시는 영화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나’의 슬픔을 넘어 ‘남’의 슬픔까지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나의 행복을 넘어 우리의 행복을 가능케 하므로.

이어서 멋있게 ‘그래서 타인의 슬픔에 닿고자 기사를 썼다’고 말하면 좋겠으나, 그럴 수 없다. 실제로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학기 남짓한 기자 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은 취재원들이 내게 철저한 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 성인 지적장애인에 관한 기사를 썼다. 취재를 위해 여러 장애인 시민단체에 연락했지만 생각보다 컨택이 쉽지 않았다. 겨우 한 분과 연결됐지만, 문제가 생겼다. 대면 취재만을 허락해 직접 영등포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평소라면 문제 될 것 없지만 당시는 코로나로 한창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시기였다. 학보사 내에서도 대면 취재를 최대한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내부 규정까지 운운하며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취재원은 여전히 대면 취재를 요구했다. 결국 다음날 직접 영등포로 찾아갔다.

취재는 무사히 마무리됐지만,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의 감정이 정확히 기억나기 때문이다. 내가 전화 취재를 고집한 이유는 코로나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화로 편히 취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카페에서 두 시간에 걸쳐 시설에도, 집에도 머물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도, 취재가 끝나자마자 든 생각은 ‘끝났다’뿐이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뿌듯함은 부끄러움으로 전락했다.

그날의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일까. 지난 일 년간의 기자 생활이 뿌듯했다거나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건 기만이니까. 기쁨이가 슬픔이 주위로 원을 그렸듯, 나 역시 타인의 슬픔에 아주 작은 공간만을 내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대부분은 슬픔이보다 기쁨이에 가깝다. 그래서 타인은 너무 쉽게 대상이 되고, 우리는 의도치 않게 폭력의 주체가 된다.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우리가 평생동안 배워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타인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슬픔이 공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공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치열한 노력 없이는 결코 ‘나’라는 작고 안온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신문사에 머문 몇 학기와 그간 작성한 기사 몇 편으로 타인의 슬픔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타인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항상 상기하기 위해 가장 부끄러운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