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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뒤집힌 판결, 역사는 움직인다‘서울역 회군’ 이후 40년, 이대수 동문을 만나다
  • 이현진 조성해 홍지영 기자
  • 승인 2020.09.20 20:11
  • 호수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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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 봄, 오랜 유신체제의 그늘이 걷힌 우리대학교에도 학원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한편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대학생 10만여 명이 서울역에 집결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은 군인들의 위협에 서울역에서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회군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에 참여한 이대수 동문(교육·75)은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8월 13일 4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이씨를 만나 지난했던 학생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들어봤다.

▶▶1980년 5월, 서울역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던 이대수 동문(교육·75)은 지난 8월 13일 40년 만에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Q. 징역 선고 이후 40년, 어떻게 살아왔을지 궁금하다.

A. 꾸준히 사회운동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 중 감옥을 오간 지난 1970년대, 80년대는 학내에서 학원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학생들과 함께 신학 등을 공부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1985년 군포로 가서 일반 민중을 조직하고 민중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민중교회를 기반으로 야간 학교와 공부방, 어린이집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도왔다. 그렇게 35년간 군포에 머무르며 지역 활동을 주로 한 후 지금은 유신체제 청산, 환경, 협동조합 활성화 등을 위해 꾸준히 목소리 내고 있다.

Q. 재심 청구까지 40년이 걸렸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재심 청구를 결심하게 됐나.

A.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사실, 계엄포고령 제1호*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지난 1980년에도 항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소를 포기하면 감형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체포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어 학생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형을 끝내고 나와서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전 변호사로부터 긴급조치와 계엄포고령 자체가 위헌이라 재심할 가치가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재심을 청구하게 됐고,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Q. 옥중 생활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A. 교도소에는 수십 년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많다. 수감 기간이 짧았던 나는 생각만큼 감옥살이가 힘겹지 않았다. 한편 1978년 수감 당시 교도소에서도 민주화를 외쳤던 기억이 남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로 9대 대통령이 선출되던 날, 서울 구치소 재소자들이 모두 소내 투쟁을 전개했다. 수감자들이 미리 구호와 시간을 정해두고 고함을 질렀다. 소내 투쟁을 모의하지 않은 재소자들도 함께 입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이것 때문에 서울 구치소의 재소자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지게 됐다. 나는 대전 교도소로 이감됐다.

Q. 항쟁의 대가는 쓰다. 험난함이 예상됨에도 민주화 운동의 길을 선택한 계기가 무엇인가.

A. 우리 가문에는 역사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없었고, 아버지는 일본에서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했다. 이로 인한 부채감이 있었기에 줄곧 기득권이 되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움직임에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생각이 같은 선배들과 만나고, 함께 공부하며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Q. 1980년 당시 ‘56인회’ 총무로 활동했다. 56인회는 어떤 단체였나.

A. 우리대학교에는 나를 포함한 총 56명의 학생이 대통령긴급조치(아래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제적됐고 지난 1979년 12월 7일 긴급조치 해제 후 복교했다. <관련기사 866호 1면 ‘긴급조치 위반 교수 학생 학교로 다시 불러들여’> 이때 복교한 56명의 복학생이 모인 단체가 56인회다. 이후 56인회는 학원 민주화를 위해 복학생과 선·후배 학생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나는 아는 선·후배가 많아 56인회의 총무로 활동했다.

Q. 1979년 12월 유신체제 종결 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머지않아 신군부 세력이 득세했다. 이 격동의 시기에 우리대학교의 풍경은 어땠나.

A. 박정희라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유신체제를 받치던 군부 세력은 호시탐탐 집권을 노리고 있었다. 학교 밖은 여전히 군부 세력의 따가운 감시 아래 경직된 분위기였지만, 적어도 학내에서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제적된 학생들이 돌아오고, 해임됐던 교수도 복교했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민주화를 준비해나갔다. 우리는 민주화의 시작이 학원 민주화라고 생각했다. 유신체제 시절에는 학교 내에 사복 경찰이 즐비했고, 학도호국단****이 학생회 자리를 대신했다. 이에 학도호국단 대신 총학생회(아래 총학)를 재건해 학생들이 직접 학생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학원 민주화를 주장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Q.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집회에 참여했다. 이날 회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A. 사실 처음에는 서울역 집회 자체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군부 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 학생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군부 세력을 자극할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학생들은 대부분 학내에서만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대학교 총학이 먼저 도시 길거리에 나섰고, 잇따라 고려대·서울대 등 다양한 서울권 내 대학교 총학생회장단이 지도부가 돼 서울역 집회를 기획했다. 서울역 집회에 10만 명이나 되는 수많은 학생이 모인 것을 봤을 때 일단은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장하지 않은 학생들이 무장 군인을 이길 리는 없지만,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드문 기회를 잘 활용해 한 획을 그을 수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부는 결국 회군을 결정했다. 참가 학생들 사이에서 회군하지 않고 버텨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지만, 일사불란한 체계가 정비돼있지 않은 상태라 이것이 지도부에게 전해질 수 없었다.

Q. 서울역 집회 이틀 후인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 선포됐다. 이후 우리대학교 민주화 운동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나.

A. 계엄령 확대 선포 이전에는 학원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계엄령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며 학생 운동의 활동 영역은 학내에서 학외로 이동했다. 군부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이겨내는 것을 목표로 움직였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당시 고립돼서 싸우던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를 알음알음 전달하는 활동도 했다. 나도 선배들과 모여 계엄령이 확대되는 날 동교동 로터리에 모여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시위 예정일에 택시를 타고 동교동 로터리 앞까지 갔는데, 막상 도착했을 때 인근에 즐비한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에 행동을 개시하지 못했다. 이 점은 지금까지도 아쉽다.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직접 활동할 여력이 없었다.

Q. 당시 ‘서울역 회군’, 나아가 학생들이 주도했던 민주화 운동의 의의가 무엇인가.

A.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학생 운동의 뼈대가 살아있는 국가다. 일제 강점기 때는 유관순 열사가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1960년 4·19혁명의 선두에 선 것도, 1964년 한일협정반대 시위를 주도한 것도 학생이다. 민주화 운동에서도 학생들의 저력이 드러났다. 당시 우리나라 학생들은 학내에서 학원 민주화를 외치다, 학교 밖으로 나가 사회 민주화를 외칠 용기를 얻었다. 학생 운동에서의 경험이 사회 민주화를 외치는 기반이 되며 사회를 실질적으로 바꿀 원동력이 됐다. 나아가 학생 운동을 함께한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 각자의 길을 걷는 중에도 한창 시절 거리로 나섰던 경험을 반추하게 된다. 이것이 기억에 남아 이후에도 사회적 의제가 생길 때면 학생인 시절처럼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각종 사회운동의 기반일 것이다.

*계엄포고령 제1호: 1979년 10월 26일 발령된 포고령으로, ‘일체의 시위 등 단체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헌법재판소는 계엄포고령 제1호의 제5항이 위헌이라 판단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 헌법에 따라 구성된 대통령 선거 기관이다. 1972년 12월에 설립돼 1980년 10월 해산되기까지 8~11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대통령긴급조치: 유신 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특별조치. 유신 헌법에 저항하는 자의 처벌을 규정하고 있으며, 위반자는 체포·구금 등으로 기본권을 침해받을 수 있었다.
***학도호국단: 유신정부가 고등학교, 대학교의 학생 자치 기구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학교 단위 자치 조직이다.

글 이현진 기자
bodo_wooah@yonsei.ac.kr
조성해 기자
bodo_soohyang@yonsei.ac.kr

사진 홍지영 기자
ji0023young@yonsei.ac.kr

이현진 조성해 홍지영 기자  bodo_wooa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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