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시선에 대해

“니하오” 동양인에게 무턱대고 건네는 서양인의 인사가 들려온다. 눈앞에 마주한 사람의 국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어두운색의 머리, 살구색 피부를 가진 자는 누구든지 중국인이다. 그들만의 국한된 시각과 편협한 생각 속에는 무례함이 가득하다. 

 

▶▶서양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그려진 지도

 

우월감과 열등감의 공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돼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라트의 브뤼메르 18일』 中

 

지난 1978년, 미국의 문명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그동안의 동양에 대한 서양의 부정확한 시선이 지적됐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서양인이 동양인에게 갖고 있는 선입견이라고 정의한다. 부정적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서양만이 동양을 안다’고 생각해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규정했다. 서양의 눈에 투사된 동양의 이미지는 비이성적이고 후진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의 다양성과 동아시아 문화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는 식민지 지배의 원동력이 됐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침략의 근거와 명분을 제시했다.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로 동양은 문명화의 대상이 됐고 수동적인 근대화만을 통해 발전 가능한 미개한 종족으로 치부 당했다. 서양의 관점에서 이뤄진 도덕적·정치적 훈계는 계몽을 가장한 착취이자 정신지배에 불과했다.

오리엔탈리즘은 오래전부터 동양인에게 내면화돼 왔다. 1884년 갑신정변 전후로 등장한 조선의 유학파는 서구의 사회학적 담론을 수입했다. 여러 담론 중 사회·문화적인 문제를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는 인종주의적 사회진화론은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한 개인의 능력이 천부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개화파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백성들이 유전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조선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열등감은 자국의 문명화에 있어 강대국인 타 국가의 개입을 부추기는 원인이 됐다. 

 

오리엔탈리즘의 거울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은 같은 서양 국가 내의 거부감으로부터 시작해 현재의 오리엔탈리즘에 반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S. Eliot) 등의 유럽 지성인들은 ‘과학만능주의와 산업화가 사회를 타락시킨다’라며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웠다. 

서구 국가들의 내부 비판으로부터 출발한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에서 ‘뒤집힌 오리엔탈리즘’으로 변질했다. 동양과 서양을 여전히 대조하고, 서양에 대한 동양만의 국한된 인식을 만들었다. 초기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이 중심인 세계관에 경고를 날리며 동양의 주체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부 비판을 넘어 서구 문화를 타자화했을 때, 옥시덴탈리스트들은 서양을 물질적이고 비인간적이라 칭하며 갈등을 자아냈다.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맞닥뜨린 여러 문제의 원인을 도시화와 산업화로 타락한 서양문명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으며, 이는 가지각색의 왜곡된 시각으로 퍼져나갔다. 동양의 눈에 비친 서양의 이미지만을 담고 있는 오늘날의 옥시덴탈리즘은 초기의 옥시덴탈리즘 담론의 의의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지식인 샤오메이 천(Xiaomei Chen)은 그의 저서 『옥시덴탈리즘』을 통해 특정 집단이 서구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마오쩌둥 이후의 중국 정부는 서양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상상 속의 서국(西國)을 만들었다. 제1세계 초강대국인 미국, 구소련을 제국주의의 주범으로 설정한 것은 자국 내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날조된 시선은 문화·예술을 가장한 반미 전쟁 영화 『上甘岭(Battle on Shangganling Mountain)』*를 통해 자연스럽게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도 보인다.

옥시덴탈리즘을 이데올로기로 삼는 정권의 영향력 자체도 매우 강하지만 이에 종교적 옥시덴탈리즘이 결합할 때 그 힘은 배가 된다. 단순한 정치 투쟁을 넘어 선과 악의 전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급진적 이슬람교도로 대표되는 종교적 옥시덴탈리즘에 따르면, 서양은 물질을 숭배하고 신의 정신에 어긋난 갈등의 대상이다. 서양을 악으로 지정하고, 자신을 선으로 지정해 대립 구도를 만든다.

 

세상을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언바루마와 아비샤이마갤릿의 『옥시덴탈리즘』은서양을바라보는적대적인편견을 지적하고, 실체를 해명한다.

 

“옥시덴탈리즘, 오리엔탈리즘 그 자체는 혐오, 편견의 문제 그 이상이다. 혐오와 편견이 혁명적인 힘을 얻게 되면 인류의 파멸이 일어난다” 

- 이언 바루마(Ian Buruma) 외 『옥시덴탈리즘』中 

지난 5월, 미국 시애틀의 거리를 걷는 동양인 남녀에게 한 백인 남성은 “코로나는 당신들 잘못”이라며 고함을 지르고 폭력을 가했다. 이외에도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인 남성이 한국인을 향해 “코로나바이러스!”라고 외치며 조롱하는 영상이 논란이 됐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발생 원인을 동양인 전체에게 전가한 것이다. 전 세계적인 난항 속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위 같은 행동은 동양인과 서양인인 자신은 다르다고 경계를 지으며 서구 사회 속 동양인을 부각한다. 동양과 서양을 분할해 구분 짓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집단 내 구성원의 결합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이 있어야 비교 가능하다는 점에서 타인의 존재가 자아의 전제로 자리 잡는다. 타인과의 비교 속 자신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봐야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더 이상 인류의 갈등은 먹고 사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을 것이다.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것, 연속적인 세상을 흑백으로 나눠 보는 것에서 새로운 시대의 갈등은 출발한다. 혐오와 편견이 만든 오독과 오해는 일상 속의 깊은 갈등으로 번지기 마련이다. 서로에 대한 왜곡된 사고는 나를 포함한 모든 집단과 개개인에 대해 나타날 수 있다. 내가 ‘나’로 판단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 상감령 전투(1956), 우리나라가 ‘저격능선 전투’라 부르는 고지전의 중국 명칭.

 

 

 

글 백단비 기자
bodo_bee@yonsei.ac.kr

<자료사진 민음사,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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