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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를 틀어줘] 질식하지 않는 관계를 위하여영화 『결혼 이야기』 속 관계에 대한 고찰

“찰리는 날 인정하지 않았어요. 자기와 별개인 독립적 인격체로요”
“난 계속 찰리와 그의 인생에 맞춰 살았어요”

영화 『결혼 이야기』의 주인공 니콜이 한 말이다. 『결혼 이야기』는 남들과 다를 것 없이 행복하던 니콜, 찰리 부부가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둘의 관계는 니콜이 아내와 엄마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품으며 파국을 맞는다. 『결혼 이야기』는 니콜의 심경변화를 따라가며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폭력적인 족쇄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은 정말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니콜과 찰리의 첫 만남은 운명 같았다. LA의 유명 배우로 촉망받던 니콜이 영화 계약 차 뉴욕으로 향한 것이 계기가 됐다. 뉴욕에서 니콜은 우연한 기회로 찰리가 연출 및 출연한 연극을 관람하게 된다. 니콜은 무대 위 찰리를 보고 단 2초 만에 사랑에 빠졌고, 찰리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에 빠진 니콜은 LA에서의 성공 가도를 포기하고 뉴욕에서 찰리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뉴욕은 니콜이 생활하기에 척박한 곳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니콜의 연기에 대한 갈증은 커졌다. 찰리가 이끄는 작은 극단에서의 연기 활동으로는 부족했다. 니콜은 LA로 돌아가 더 큰 꿈을 펼치고 싶었지만, 찰리는 니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LA에서 생활해보자는 니콜의 말에 극단과 아들 헨리를 위해 뉴욕에 머물러야 한다고만 답한다. 그렇게 찰리의 세계에 맞춰 살며 니콜은 자신이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가 돼간다고 느낀다. 그러던 중 니콜에게 생명줄 같은 기회가 생긴다. LA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의 주연 배우로 캐스팅된 것이다. 그러나 찰리는 별 볼 일 없는 드라마라며 니콜을 비웃고, 출연료를 극단의 예산으로 쓰자고 말한다. 격려와 존중의 말을 기대했던 니콜은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받고 이혼을 결심한다.

니콜과 찰리의 파경은 얼마 전 유튜브로 본 행위 예술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유고슬라비아의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h)와 그의 연인이었던 울라이(Ulay)가 함께한 「자가죽음」이라는 공연이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담배 필터로 콧구멍을 막고 서로의 날숨에만 의지해 키스하는 행위 예술을 펼쳤다. 공연은 17분 만에 마리나와 울라이가 이산화탄소 과다중독으로 실신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리나와 울라이의 폐가 서로가 내뱉은 이산화탄소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자가죽음」은 상대방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서로를 질식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니콜과 찰리가 이혼하게 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니콜은 찰리를 너무 사랑해 자신의 삶마저 돌보지 않았다. 찰리는 그런 니콜을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다. 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니콜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만약 니콜이 찰리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찰리도 니콜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도록 존중했다면 이 부부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사랑과 헌신으로만 채워진 관계는 사람을 질식시키지만 적절한 ‘거리 두기’가 있는 느슨한 관계는 소속감 속에서 사람을 숨 쉬게 한다.

니콜과 찰리만의 이야기?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니콜과 찰리, 마리나와 울라이처럼 부부 혹은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나는 『결혼 이야기』를 보는 내내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이혼을 앞둔 니콜이 자책하며 우는 모습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학보다는 국어와 사회를 공부할 때 행복했던 나는, 그해 겨울 이과 진학을 희망한다는 진로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내가 이과로 진학하기를 희망하셨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동생이 한 명 있다.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동생은 아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동생이 그저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내게는 달랐다. 부모님은 내가 성품도 올곧고 공부도 잘해 동생에게 모범을 보이는 장녀가 되길 바랐다. 부모님의 기대 속에서 힘들고 답답했지만, 동시에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행복을 느꼈다.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내게는 꿈보다 부모님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이과 진학 희망서를 제출한 그해 겨울 이후로 나는 혼자 우는 날이 많아졌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가 힘들었고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부턴가 부모님의 믿음을 저버린 나쁜 딸이 됐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부모님의 어두운 표정을 마주해야 했고, 결국 수능까지 망친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꿈도 잃고 가족과의 관계마저 무너진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낭떠러지로 향하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나는 깨달았다. 나의 맹목적인 희생이 사랑하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를 잃지 않아야 건강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나는 문과로 전향해 재수를 결심했다. 부모님이 만류했지만 이번에는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 년 동안의 재수 생활은 힘들었지만 내가 중심이 된 삶은 행복했다. 자연히 부모님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됐다.

가족 간 ‘거리 두기’의 힘은 『결혼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니콜과 찰리는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거리 두기 이후에 서로를 존중하는 성숙한 관계를 맺게 됐다. 니콜은 이혼 후 LA에서 유명한 배우가 됐고 감독 일까지 겸하며 능력을 마음껏 펼치게 됐다. 찰리는 그동안 자신의 생활방식만 고집했던 것을 반성하며 UCLA 전임 교수직 제안을 수락하고 LA에서 연극 감독 일을 맡게 됐다. 그렇게 니콜과 찰리는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시작한다.

아직도 고등학생이던 나를 떠올리면 가끔 눈물이 난다. 열일곱 살 어느 겨울날의 선택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그때 이후로 나는 더욱 성숙해졌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됐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의 나에게 미안할 뿐이다. 나를 좀 더 사랑해 줄걸. 나 스스로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여줄걸.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나처럼 후회하지 않길, 앞으로의 나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글 송정인 기자
haha2388@yonsei.ac.kr

<사진제공 다음영화>

송정인 기자  haha2388@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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