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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주년 특집] 응답하라 연세춘추80년대, 90년대의 춘추人을 만나다
  • 정희원 기자, 연세춘추
  • 승인 2020.08.30 20:15
  • 호수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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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문은 1935년 9월 1일 처음 발간돼 올해로 85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수많은 기자가 우리신문사를 거쳐 갔다. 현재와는 사회 분위기가 달랐던 80년대, 90년대에 기자 생활을 했던 두 동인의 기고를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해봤다.

진실에 대한 의지와 정의에 대한 용기,
임문영 동인

Q. 자기소개 부탁한다.
A: 지난 1985학년도 2학기부터 1988학년도 1학기까지 연세춘추에 몸담은 56기 임문영이다. 현재 경기도청 미래성장정책관으로 활동 중이다.

Q. 우리신문사에 지원한 계기가 궁금하다.
A: 입학했을 때부터 학보사 기자로 일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서클활동을 하고 있었고, 잦은 시위와 시험에 바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클 선배가 ‘너는 연세춘추에 가서 일하는 게 낫겠다’고 제안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서클보다 학보사에 더 맞는 성격이라고 봤던 것 같다. 흔히 민주화운동에서 지하서클은 비합법운동, 학보사 활동은 합법운동으로 불렸다. 이후 필기시험과 면접 과정을 거쳐 겨우 합격하게 됐다.

Q. 당시 우리신문사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A: 매주 신문을 만드는 건 고달픈 일이었다. 신문사 소파에는 항상 담뱃불 자국과 지저분한 냄새가 남아있었다. 모두 밤샘의 흔적이었다. 낯선 편집회의에 참여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행복감이 있었다. 특히 그 결과물을 교문과 신문사 창구를 통해 나눠줄 때 보람을 느꼈다.

Q. 우리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A: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독립기념관 애국지사 가짜 글씨 사건’이다. 당시 독립기념관에는 일제 강점기 애국지사가 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썼다고 알려진 글씨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글씨가 가짜라는 사실을 학교 체육 수업 도중 우연히 알게 됐다. 그 글씨를 쓴 장본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관된 글씨의 아라비아 숫자 표기법이 일제시대의 표기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취재에 나섰다. 결국 우리신문사에서 해당 글씨가 가짜였음을 알아내 이를 기사화했다. 그날 각 신문과 TV가 우리 기사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모두 희열을 느꼈다.

Q. 우리신문사에서의 경험이 인생에 어떤 도움을 줬나.
A: 연세춘추는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당시 우리는 독재정권의 탄압과 현실적인 학내언론의 운영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진실에 대한 의지와 정의에 대한 용기를 추구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문제작과 편집뿐 아니라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배울 수 있었다.
20대에 사회에 필요한 의제를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질 수 있었던 것은 개방적인 학교 분위기 덕분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자치적인 학내언론을 인정했고 학생들은 그 공간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역할을 키웠다.

「응답하라 1994」에서 해태 역을 맡은 손호준 배우가 우리신문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나에게 연세춘추란 열정이었다,
이세영 동인

Q. 자기소개 부탁한다.
A: 지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연세춘추에서 활동한 66기 이세영이다. 현재는 한겨레 정치팀장을 하고 있다.

Q. 우리신문사에 지원한 계기가 궁금하다.
A: 애초에 신학과 전공을 살려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교사나 회사원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언론인을 꿈꾸지도 않았지만 소속감을 갖고 열정을 쏟아부을 준거집단이 필요했다. 그게 연세춘추였다.

Q. 현재 우리신문사는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해 수습기자를 선발한다. 당시에는 어떤 방식으로 수습기자를 모집했는지 궁금하다.
A: 「연세춘추」 1면에 실린 예비수습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지원서를 제출한 뒤 본 필기시험은 논술 형식으로 치러졌다.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 중 택일하시오. 1. 철학의 당파성에 관해 논하라. 2. 최근 민족민주운동진영의 통일 운동에 대해 평가하라.’ 문장과 논리력뿐 아니라 운동권에 대한 지식과 정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논제에 가까웠다.
필기시험을 치른 지 일주일이 지나 면접을 봤다. 면접 분위기는 살벌했다. 지원 동기와 인상 깊게 읽은 기사, 책 등을 물어봤다. 이후 합격 사실은 핀슨홀 외벽에 붙은 합격자 공고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Q. 현재 우리신문사 수습기자는 로테이션 과제를 수행하며 업무능력을 터득한다. 당시에는 수습기간 동안 어떤 업무를 진행했는가.
A: 예비수습 과제는 비교적 단순했다. 출근 전까지 ‘1단 기사’*와 ‘애드바룬’ 글감을 찾고, 정해진 시각 취재부에 모여 초고를 작성했다. 취재부장과 정기자가 초고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첨삭했고, 주로 밤 9시가 넘어서야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Q. 우리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인가.
A: 제작거부를 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개강을 앞둔 지난 1992년 2월, 우리신문사는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의 표면적 계기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규정 학점에 미달한 기자 3명 징계안을 둘러싼 기자들과 편집인 교수 간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신문 콘텐츠에 관한 학교와 학생 기자단 간의 누적된 갈등이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제작거부는 양쪽이 한발씩 물러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학교는 학생 기자와 자주 충돌한 대학원생 편집위원을 교체했고, 우리는 학점 규정에 걸린 기자 3명이 ‘6개월 휴직’ 기간 동안 비공식 활동을 하는 선에서 제작에 복귀했다.

*1단기사: 제목 외 3줄, 4줄 정도로 짧게 단신 처리한 기사

글 정희원 기자
bodo_dambi@yonsei.ac.kr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자료사진 tvN 「응답하라 1994」 캡쳐화면>

정희원 기자, 연세춘추  bodo_damb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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