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주년 특별 기고

 

이종수 동인회장(정외·84)

 

연세춘추사에 적을 둔 때는 지난 1984년 봄부터 1986년 여름까지이다. 사람마다 이 시기를 다르게 규정하겠지만 내겐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가 시작한 때부터 학생운동권이 양분돼 치열한 이론투쟁을 벌이던 무렵으로 기억된다. 당시 춘추사는 학생운동에 영향받았고 다수의 기자들이 자신을 학생운동세력의 일원으로 여겼다.

춘추사 입사를 위해 치른 면접 과정을 회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당시 취재부장이 다소 권위적인 태도로 “니 욕할 줄 아나, 한번 해봐라”는 황당한 요구를 했고, 그 요구에 담긴 의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중 · 등학교 학생들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XXX들이란 욕설을 내뱉고는 어색해서 “죄송하다”며 어줍게 대응했었다. 이후 취재부장에게 그처럼 품위 없는 요구를 한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대가 센 후배를 뽑기 위한 기습 정도가 아니었겠나 짐작했다.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전 짭새로 불리는 경찰을 학내에 상주시키며 시위를 무력진압하고 대학언론에 대해 검열을 일삼는 정권의 폭력에 맞서야 했던 선배들에겐 대찬 후배를 뽑아야 춘추가 정도를 걸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성싶었다. 입사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지금 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가 어느 술자리에서 부른 노래는 내 짐작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게했다. 가수 조용필이 불러 히트친 ‘촛불’이란 곡에, 가사를 바꾼 노래의 노랫말은 이랬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대는 왜 가위를 드셨나요. 그대는 왜 가위를 드셨나요, 연약한 이 신문을 누가 지킬까요, 가위야 멈춰라, 이 신문을 지켜다오!”

당시 춘추 기자들은 군사독재 권력이 통제하는 사회 속에 있는 대학에선 결코 학문 활동의 자유가 보장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대학이 자랑스런 전통으로 여겨온 사회계도 기능도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독재 권력으로 오염된 대학의 공기를 바꿔 상아탑을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한 춘추의 몫은 해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편집인, 주간 교수도 이러한 학생 기자들의 문제의식과 비판 정신을 살려가되 편향된 인식에 대해선 설전을 벌이고 제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가며 살얼음판을 걷듯 춘추를 제작했다. 2년 반을 이런 반독재 비판 의식으로 춘추를 만들었고 이러한 사회 비판 정신과 민주화 의지는 기성 언론에 진출해서도 젊은 언론인이 지향했던 취재 보도에 동력이자 나침반으로 작용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러갔고 우리 사회도 세계화에서부터 양극화 해소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 모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앞으로 힘겹게 변화를 겪어나갈 것이다. 언론인으로 다방면에서 취재 보도하고 데스크 생활도 거친 이후 요즘 연세춘추를 돌이켜보면 춘추사가 있었던 핀슨홀 앞 윤동주 시비가 먼저 떠오른다. 춘추를 오가며 거의 매일 마주한 시비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란 시구가 새겨져 있다. 윤동주 선배님의 시구절에 절절히 표현돼있는 ‘양심’,‘양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비판이 자칫 현실을 도외시한 일방적 주장이나 심지어는 포장에 그칠지도 모를 일이다.

연세춘추가 세상에 빛을 본 지 85주년을 맞이했다. 연세춘추는 한국어 말살 운동을 펼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탄생한 이후 줄곧 대학언론을 선도하며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 양면에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증언하고 나아갈 바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실천해 왔고 그런 인재를 끊임없이 배출해 왔다. 이러한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나가면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인재들을 세상에 쉼 없이 배출하는 화수분이 되길 바라고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종수 동인회장(정외·84)
chunchu@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