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빌보드』로 바라보는 사회 속 언더도그마

선과 악의 대립은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그리고 그 결말은 언제나 권선징악이다. 하지만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강한 신념은 거짓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색지대의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선악구도를 탈피한 영화
『쓰리빌보드』

 

“내 딸이 죽었다.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윌러비 서장”

 

어느 날, 미국 남부의 시골마을 광고판에 위와 같은 글이 새겨진다. 영화 『쓰리빌보드』 속 이야기다. 강간살해범에게 딸을 잃은 밀드레드는 무능한 경찰 윌러비를 비판하기 위해 광고를 낸다. 조용하던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경찰과 마을 사람들은 광고판 철거를 요구한다. 여기까지 본 관객들은 부패한 공권력과 불쌍하고 정의로운 피해자 사이의 흔한 대립 구도를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어머니는 딸에게 폭언을 가하던 과격주의자였고, 무능한 경찰은 모두에게 존경받지만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온정주의자라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죽음을 앞둔 윌러비 서장이 밀드레드를 위해 한 달 치 광고비를 대신 내주는 장면에서, 밀드레드의 복잡한 표정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보다 더욱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는 질문할 것이다. ‘도대체 누가 악인이란 말인가?’

『쓰리빌보드』는 반전을 거듭한다. 이 영화 속에는 이분법적 선악구도에 들어맞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권선징악이나 신파 또한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피해자가 되기도,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상호작용을 거치며 설득력 있는 변화를 보여주기도 하는 등 입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누군가의 편을 들거나 다른 한쪽을 비방할 수 없게 된다.

옳다고 믿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영화 『쓰리빌보드』를 통해 흑백논리에 익숙해진 현대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프레임이 깨지는 순간 관객들은 혼란함을 넘어 이질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회적 프레임은 비단 영화 속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보수단체 전략가 마이클 프렐(Michael Prell)은 강자를 악에, 약자를 선에 치환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일컬어 ‘언더도그마’라고 칭했다. 언더도그마는 확률적으로 타당할 수 있으나, 수많은 반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꼽히는 대표적 사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가해자, 비도덕적인 부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권력자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누군가는 그들을 한데 묶어 악인의 이미지를 고착화하기도 한다. 한편 소수성을 지닌 민족, 인종, 성별, 종교 집단 등은 만능의 희생양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과 악의 본질을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단지 그러한 믿음을 진리로 만들고 싶은 ‘진리의지’만이 거기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강자에게 적용되는 언더도그마는 때로 면죄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고착화된 강자의 전형에서 벗어나 조금만 그 태(態)를 바꾸면, 여론은 쉽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쓰리빌보드』 속 마을 주민들이 도덕적으로 훌륭하며 좋은 이웃이었던 윌러비 서장에게 강자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하고 도리어 밀드레드를 비난했듯 말이다. 이를 두고 사회심리학자인 고든 올포트(Gordon Willard Allport)는 사람들이 단일한 사건이나 집단을 ‘유형화’하고 친숙한 범주 속에 넣은 후, 그에 따라 사고 및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스크린 밖 사회 속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는 흔하다. 유명 웹툰 작가 기안84의 사례가 그러하다. 그는 능력 없는 여성 구직자가 성(性) 상납을 통해 정규 채용되는 모습을 그려 논란이 됐다. 그러나 기안84를 바라보는 여론의 심판 잣대는 지나치게 느슨하다.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순수한’ 그의 모습에 강자의 이미지가 투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안84가 출연하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제작진 또한 계속된 논란에도 그를 ‘아픈 손가락’이라 칭하며 선한 이미지로 출연시키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해자가 언제나 강자이지 않고, 강자 또한 언제나 악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친근한’ 동네 형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으며,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듯한 ‘순수한’ 청년의 손에 무기가 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한편, 언더도그마는 약자에게 더욱 위험한 폭력으로 작용한다. 언더도그마가 약자에게 우호적인 신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프레임에 불과하다. 유형화에 빠진 사람들은 피해자, 소수자 등을 한 데 묶어 약자의 이미지를 고착화한다. 공격적인 태도를 띠거나 도덕적으로 불온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약자의 범주에 들지 못하며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약자들에게 엄격한 심판의 잣대를 들이밀며 비난하는 모습은 이미 낯설지 않다. 『쓰리빌보드』 속 밀드레드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판단이나 행위를 할 때, 사람들은 진범보다 그를 더 비난하는 수준에 이른다. 윌러비 서장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이 밀드레드의 가족에게 달걀을 던지며 괴롭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약자를 규정하는 시선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얄팍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또한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니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은 음란행위를 자행했다는 이유만으로 2차 가해의 희생양이 됐다. 피해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성(性)적 결백 입증을 강요하는 것은 잔인한 폭력으로 작용한다. 피해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인 그들은 이기적일 권리가 있고, 심지어 도덕적으로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다. 완전무결한 약자의 전형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을 심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배척해야 할 것은 고착화된 프레임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피해 사실조차 외면하는 유형화와 흑백논리일 것이다.

윤리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착하거나 나쁘게 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약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강자를 경계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조건 없이 약자를 우대하는 정책은 그들에게 씌워지는 프레임을 고착화하는 포퓰리즘에 그칠 위험이 있다.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약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론장의 마련과 흑백논리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들에게 유독 관대하거나 엄격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 듯하다.

 

『쓰리빌보드』의 백미는 단연 윌러비 서장의 부인이 남편의 유서를 밀드레드에게 전하러 온 장면이다. 유감을 표하는 밀드레드 앞에 선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됐다. 이어 “내 탓을 하고 싶은가”라고 묻는 밀드레드에게 그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라 편지를 전해주러 온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온전한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전한 적으로 남지 않는다. 밀드레드를 원망하지만 그를 손가락질하지 않는 윌러비 서장의 부인과 여전히 분노하면서도 윌러비 서장의 죽음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밀드레드의 투샷은 고전적이면서도 명확한 한 가지 진실을 시사한다. 세상에 완벽한 악인은 없다.

 
 
글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자료사진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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