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호 의원에게 87년을 묻다

9일(화) 낮 2시, 이한열동산에서 ‘제33주기 이한열 추모식’(아래 추모식)이 열렸다. ‘연세대학교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번 추모식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소규모로 진행됐다. ▲김동훈 행정대외부총장 ▲이한열기념사업회 강성구 이사장 ▲이한열 열사(경영·86)의 어머니 배은심씨 ▲김거성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민갑룡 경찰청장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 등 내·외빈이 참석했다.

 

▶▶ 지난 9일 우리대학교 이한열동산에서 고(故)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33년의 세월, 연세의 가슴 속에

 

교목실장 이대성 교수(신과대·조직신학)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추모식은 ▲찬송과 기도 ▲추모사 ▲이 열사 조형물 제막 ▲추모 공연 ▲헌화의 순서로 진행됐다. 경영대학장 서길수 교수(경영대·정보시스템)는 추모사에서 “이 열사는 34만 연세인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연세인”이라며 “이 열사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외친다”고 말했다. 이어 강 이사장은 “이 열사의 삶과 죽음은 우리 미래의 중심을 잡아줄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추모도 있었다. 학생추모기획단장 김지섭(국문·16)씨는 “우리의 평화로운 오늘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며 “이 열사를 포함한 많은 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이 열사 조형물 제막식이 진행됐다. 그간 이한열동산에 있던 조형물은 지난 2017년 이 열사 30주기 추모식을 위해 제작돼 일시적으로 이한열동산에 비치된 것이었다. 조형물이 많은 사랑을 받자 동산에 계속 두었으나, 외부 충격에 약했다. 33주기를 맞아 최병수 작가는 조형물을 이전보다 더 튼튼한 재질로 만들었다. 이 열사의 피격 장면을 모티브로 한 이 조형물은 별을 넣어 어두운 시대에 이 열사는 별과 같이 빛났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번 추모식에는 민갑룡 경찰청장이 참석해 이목을 끌었다. 경찰청장이 이 열사의 유족을 직접 만나 사과의 뜻을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 청장은 배씨에게 “너무 늦었고 참회한다”며 “마음 깊이 새기고 성찰하며 더 좋은 경찰이 되겠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에 배씨는 “현장에 와줘서 감사하다”며 “33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87년 그날이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우상호 의원에게 듣는 1987년과 2020년

 

추모식이 끝난 후, 기자는 지난 1987년 우리대학교 총학생회장직을 맡았던 우상호 의원(국문·81)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Q. 1987년의 연세 학생사회는 총학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우 : 혼란기였다. 정권의 폭압이 심해졌고 학생운동의 방향 전환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1986년도까지 수많은 학생이 경찰에 잡혀가며 조직 역량도 많이 줄었다. ‘대중적인 학생회’를 돌파구 삼아 운동권과 비운동권 간의 간극을 좁히려 했다. 문화행사와 축제 등을 통해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러나 5월을 기점으로 총학 활동의 변화가 생겼다.

 

Q. 5월에 무슨 일이 있었나.

우 : 4·13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표 등이 이어졌다. 호헌조치에 저항하는 학생들이 학생회관에서 단식 농성을 진행했다. 경찰들이 유리창을 깨고 폭력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끌고 갔고, 학생회관에 피가 낭자했다. 긴급 학생총회를 열어 이에 저항했다. 평화적인 농성을 했음에도 학생들이 끌려가는 장면을 모두가 목격했다. 학생들이 두 눈으로 확인하며 서서히 민주화 운동에 마음을 열었다.

 

Q. 그것이 6월 9일에 많은 학생이 모인 계기가 된 것인가.

우 : 그렇다. 학생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며 많은 학생이 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는 아무런 장비도 없이 6월 9일 집회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을 직격으로 쐈고, 한열이가 쓰러졌다.

 

Q. 이 열사에 대한 기억이 남다를 것 같다.

우 : 한열이의 죽음을 생각하면 늘 괴롭다. 내가 맨 앞에서 죽었어야 하는데 나 대신 죽었다는 죄의식이 늘 나를 괴롭힌다. 집회가 끝나고 나서야 한열이의 소식을 들었다. 한열이 부모님께 연락해서 밤 중에 가족들이 광주에서 올라오셨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감동적인 기억도 있다. 한열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학생들은 낮에는 시위하고 밤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지켰다. 한열이를 탈취하려는 경찰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다. 운동권, 비운동권 가리지 않고 하루에 수백 명의 학생이 병원을 지켰다. 벽을 허무는 순간이었다. 데모에 참여하지 말라던 어느 학생의 부모님이 김밥을 싸서 챙겨주시기도 했다. 서로의 오해를 풀고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Q. 이후로도 민주사회를 위한 움직임을 계속해왔다. 당시 바라던 사회의 모습이 도래했나.

우 : 당시 한열이를 비롯해 학생들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외쳤다. 현재 대한민국에 절차적 민주주의는 정착됐지만 경제적 민주주의가 남았다. 남북관계도 예전의 적대적 관계는 해소됐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 아쉽다. 더디지만 한열이의 꿈이 부분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한열이가 살아있으면 ‘형 그것밖에 못 해?’라고 했을 것 같다.

 

Q. 시대가 많이 변화하며 학생사회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우 : 시대에 따라 총학의 위상과 역할이 바뀌는 것은 맞지만, 총학이 약화되면 학생의 권리도 약화된다는 것은 틀림없다. 학생과 소통하고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학생들이 졸업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학생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다만 학생사회에 대한 관심을 병행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청년실업 등 문제도 예전 학생들처럼 조직적으로 해결을 요구하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각자의 삶과 취직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움직이는 것도 현명할 수 있다.

 

Q.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우 : 다양한 도전을 해봤으면 좋겠다. 취업을 위해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다양한 경험은 지도자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조직’, ‘관계’, ‘설득’ 등 수많은 가치를 얻을 것이다.

 

 

글 박진성 기자
bodo_yojeong@yonsei.ac.kr

사진 조현준 기자
wandu-ko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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