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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쓰러지고, 서른세 번째 6월치열했던 6월의 기록, 열사를 기억하는 저마다의 목소리
  • 김수영 이현진 정여현 기자, 이연수 수습기자
  • 승인 2020.06.07 20:21
  • 호수 1854
  • 댓글 0

1987년 5월 13일, 우리대학교에서 호헌철폐와 군부 독재 종식을 외치며 단식 투쟁을 하던 36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에 15일 열린 학생총회에 운집한 4천여 명의 학생이 교내를 행진하며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뜻을 모았다. 이후 풀려난 이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6월 9일 개최됐다.

▶▶ 이한열 열사(경영·86)의 33주기를 기념해 그를 기리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한열동산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조형물은 이 열사에 대한 애도의 상징이 됐다.

그날, 한열이는…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눈과 귀, 민족과 함께 해온 민족 연세의 열혈 전통으로
민주주의 대동 단결의 장, 6월 9일 궐기대회에 참여합시다.

- 6월 9일 총궐기 참여를 독려하는 총학생회의 유인물 中

1987년 6월 9일, 총학생회(아래 총학) 사회부장 우현 동문(신학·84)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구출학우 환영 및 6.9일 애국연세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국문·81)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그러나 집회가 종료된 후 정문에서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다. 500여 명의 경찰이 교내로 들이닥쳤다. 교정은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찼다. 경찰이 규정을 어기고 최루탄을 직사했다. 비극이 발생했다. 이한열 열사(경영·86)가 쓰러졌다. “나 내일 시청에 가야하는데”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우리대학교 학생들은 이 열사의 부상을 슬퍼하며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를 표했다. 여러 차례 규탄대회와 결의대회를 통해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규탄했으며, 서대문 경찰서장 등 이 열사의 부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장에 많은 학우가 서명했다. 당시 안세희 전 총장, 상경대 교수진도 관계 당국의 책임을 묻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 열사가 입원해 있는 동안 학생들은 경찰로부터 이 열사를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서 경비를 서기도 했다. 이한열기념관 이경란 관장(교육·85)은 “당시에는 경찰이 부상자를 데려가 의문사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6월 9일부터 한 달 내내 하루 약 500여 명의 학생들이 돌아가며 한열이를 지켰다”고 말했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 행렬


그러나 약 한 달 동안 세브란스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이 열사는 결국 1987년 7월 5일 명을 달리했다. 이 열사의 장례는 7월 9일 ‘애국학생 故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졌다. 당시 경찰은 이 열사의 시신 탈취를 시도했다. 이 관장은 “한열이의 관을 운반하던 학생들은 경찰들의 폭력 행위를 우려해 낫을 품속에 숨기기도 했다”고 전할 만큼 상황은 긴박하게 진행됐다. 우리대학교 본관 앞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신촌로터리와 서울시청 광장에서 노제를 지냈다. 운구 행렬 당시 서울시청 광장에는 약 100만 명의 시민이 집결했을 만큼, 수많은 시민이 이 열사의 죽음을 애도했다. 송영길 의원(경영·81)은 “이한열의 죽음은 어린 학생의 희생에 기성세대가 결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6월 항쟁을 촉발했다면 이 열사의 죽음은 전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연세민주동문회 이강수 사무국장(중문·84)도 “이 열사의 피격은 모든 연세 학생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며 “이후 집회 참가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학생들도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움직임이 일었다”고 전했다.

2020년의 이한열을 추모하다

이 열사의 죽음은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있다. 우리대학교 정문에서 쓰러진 이 열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오늘날까지 6월 항쟁, 나아가 우리나라의 민주화 투쟁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1987년의 청년’은 이 열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오늘날의 ‘열사 이한열’이 아닌 ‘한열이’를 회상했다. 이 열사가 쓰러진 뒤 한 달 내내 우리대학교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진행됐다. 집회 현장에 꾸준히 함께했던 이 관장은 “누구나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외치다 보니 ‘한열이’가 입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나아가 이 관장은 “그 집회에 있던 누구라도 최루탄에 맞을 수 있었다”며 “우리에게는 한열이가 최루탄을 대신 맞았다는 부채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우리대학교 이한열추모기획단과 협력해 여러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오신영(생디·18)씨가 출품한 그림 ‘그대 없는 서른 세 번째 봄, 그대 미소 꽃피우고 능소화가 만개하리’. 55세가 된 이 열사의 모습이다.


‘2020년의 청년’도 이 열사를 기리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일에는 학생회관 외벽에 추모 걸개그림이 걸렸다. 또한 영화 『1987』을 시청하는 ‘이한열 열사 추모 RC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한열추모기획단에서는 지난 6월 2일부터 9일(화)까지 ‘이한열 문화제 온라인 전시회(아래 전시회)’를 진행한다. 이한열추모기획단장 김지섭(국문·16)씨는 “기존엔 온·오프라인 행사를 동시에 진행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오프라인 기획은 취소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이한열 열사는 우리대학교 학생들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라며 “열사의 추모기간을 맞아 연세인 모두가 열사와 그 시대를 되새기고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시회 기획 취지를 전했다. 학생들은 전시회에 시, 그림 등 총 31개의 다양한 작품을 제출했다. 이중 그림 ‘그대 없는 서른 세 번째 봄, 그대 미소 꽃피우고 능소화가 만개하리’를 출품한 오신영(생디·18)씨는 “우리는 은연중에 이 열사를 열사의 이미지로 굳혀놓고 있는 것 같다”며 “더 넓은 시각에서 이한열이라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오씨의 작품은 이 열사가 살아 55세가 된 모습을 상상했다. 전시회 출품작들은 총학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9일(화)에는 이 열사의 추모행사가 진행된다. 낮 2시 한열동산에서 열리는 추모식에는 ‘한열이를 살려내라’ 조형물이 제막될 예정이다. 또한 7월 5일에는 이 열사가 안장된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기일 추모제가 열린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는 오랜 시간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수많은 열사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 다가올 6월에도 그날을 기리는 움직임은 멎지 않을 것이다. 그날 ‘한열이’가 떠났다. 그리고 서른 세 번의 6월이 왔다.

글 김수영 기자
bodo_inssa@yonsei.ac.kr
이현진 기자
bodo_wooah@yonsei.ac.kr
이연수 수습기자
chunchu@yonsei.ac.kr

사진 정여현 기자
jadeyjung@yonsei.ac.kr

<사진제공 우리대학교 박물관, 오신영>

김수영 이현진 정여현 기자, 이연수 수습기자  bodo_inss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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