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정 편집국장 (ECON/CLC·16)

“5학기 동안 기자로, 부장으로, 그리고 편집국장으로서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국장 임기를 마치면서 쓰는 마지막 글이라는 거창한 의미 부여치곤 진부한 글머리다. 자신이 속해있던 집단을 떠날 때쯤 다들 이렇게 말하더라. 어쩌면 내게도 입에 발린 말에 그쳤을지 모르는 이 문장은 내 5학기 동안의 소견을 여실히 드러낸다.

내가 한창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학내는 총여학생회 논쟁으로 뜨거웠다. 총여학생회를 폐지해야 한다와 폐지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부끄럽지만 우리신문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학내 사안에 전혀 무관심하던 사람인지라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곧 학내 사안을 보도하는 부서에 배정돼 엉겁결에 관련 취재를 전담하게 되면서 점차 무슨 일인지 알아갔다. 첫 느낌은 두려움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갈등을 글로 담아내야 하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사안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막연히 중립을 지킨답시고 양쪽에서 나오는 모든 얘기를 기사에 무작정 담아보자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걸 중립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기자의 고민이 담기지 않은 기사는 얕을 수밖에 없었다. "네 기사엔 깊이가 없어"라는 한 동료 기자의 직언을 듣고서야 아무리 사실관계가 완벽해도 사안에 대한 기자의 다각적인 고민 없이는 피상적인 글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관련 기사를 계속해서 준비하면서, 여러 학내 구성원과 이해 당사자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 깊이가 깊어지면서 사안의 겉표면만 다루던 내 기사에도 한층 한층 목소리가 입혀졌다.

지난 2019년 3월, 이번엔 깊게 고민하고 낸 기사였지만 나는 또 한 번 겁을 먹었다. 일부 독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아니다. 독자는 기사를 읽고 든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 독자의 피드백은 기자가 본인의 기사를 되짚어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 보완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겁먹은 건 조금 더 밑으로 스크롤을 내린 뒤였다. 기사 아래 이어진 일부 댓글과 학내 커뮤니티 게시글에 내 이름과 학과, 학번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단순히 내가 총여학생회에 대해 기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기사에 담긴 내용이 본인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으로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추측과 무자비한 비난이 올라와 있었다. 지금은 관련 게시물이 많이 사라진 상태지만 기사 밑에 달린 댓글 중 ‘메모: UIC ECON16 이승정’이라는 댓글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 신상 정보를 메모해서 뭘 하려는 걸까, 무서웠다.

다행히 나에게 어떤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지진 않았다. 곧 내 이름이 박힌 게시물도, 기사와 관련한 얘기도 잠잠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익명’들에게 이름을 불리고 나니 오히려 기자로서 내가 갖춰야 할 태도와 내가 써야 할 기사가 명확해지는 듯했다.

굳건한 나만의 생각을 가지는 건 좋다. 그걸 얘기할 줄 아는 용기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 생각과 용기가 다른 쪽의 이야기를 무참하게 짓밟거나 맹비난하는 데 이용돼선 안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수없이 많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적으로 바라보면 그들에게도 나는 적이다.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내 목소리는 ‘고집’이 되고 내 용기는 ‘유난’으로 치부된다.

나는 여전히 내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신문사에서 활동하면서 적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게 됐고, 위축되지 않고 내 의견을 제시할 용기를 가지게 됐다. 일부러 거센 단어를 쓰거나 익명의 벽 뒤에 숨지도 않는다. 5학기간 우리신문사 활동과 8학기간 학교생활의 마무리를 동시에 앞둔 이 시점에 감히 바라는 게 있다면, 이제는 서로를 향한 질타와 비난이 아닌 건설적인 논의가, 익명의 탈을 쓴 소모적인 논쟁이 아닌 생산적인 대화가 학내외로 오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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