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진 초빙교수 (우리대학교 학부교육원)

어머니와 둘이서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호적등본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어머니 이름에 떡하니 “이혼”이라는 단어가 찍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 20여 년이 지난 별거의 생활에 이까짓 서류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도 펑펑 우셨다. 군대에 있었던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담고 이혼무효소송을 제기하려 중대장께 부탁드려 특별휴가를 3일간 받아 온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여성단체들과 무료법률상담기관을 다 다녀 봤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었고 그 비용은 그 당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었다.

아직도 그 신설동 5거리를 기억한다.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려가던 3일 휴가의 마지막 날,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스스로의 무능에 절망하며 걸음을 걷다 문득 눈에 보이는 법무사 사무실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따뜻하게 나를 받아 차를 한잔 대접해 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신 그 법무사님은 그 당시 참 어렸던 나에게 ‘이혼의 책임은 결국 반반’이라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에게 아버지는 나를 버린 나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20대가 되도록 키워주신 너무 좋은 분이셨다. 그러나 그 법무사님의 말을 통해 나는 내 아버지가 나쁘지만 그게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써도 될 만큼의 어떠함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지게 됐다. 나는 지금도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분을 통해 세상의 많은 일들이 언제나 어느 한쪽의 문제로만 결론 낼 수는 없다는 나름의 소중한 삶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합리적이고 내가 보기에 정의이고 내가 보기에 의로운 것이지 그것이 모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아픔이 참 힘들었지만, 그러나 그 옛날 “나”를 버린 아버지의 선택에 살짝 이해의 첫 발자국을 내 디딜 수 있었다.

내가 전공하고 가르치는 “상담”의 영역에서 전문적인 상담자에게 요청되는 매우 중요한 기술은 사람에 대한 편견과 이를 통한 판단을 배제하는 것이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이나 행동 또는 내담자의 이야기 가운데서 어떤 부분들에 대한 선이해를 통해 내담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 상담은 의미가 없어진다. 드러난 행동이나 어떤 결과가 그 사람의 사회적인 환경 가운데에서 이미 정해진 이야기라면, 그 안에 감추어진 그 사람만의 소중한 삶의 이야기가 상담자가 들어야 할, 그리고 내담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상담은 바로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의 삶에 공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상담자의 편견과 판단은 상담자로 하여금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내담자로 하여금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박탈당하게 한다. 상담자는 자신의 부족함과 아픔과 상처와 분노와 울분과 어리석음에 한 걸음도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내담자에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토로하게 하고 그래서 자신을 이해받을 수 있는 조그마한 숨구멍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나쁘고 좋음으로 결코 구분할 수 없는 소중한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단언하건데 그건 누구에게나 있다.

대학을 다니며 제일 많이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전공일 것이다. 그리고 또 두 번째 꼭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있는 숨겨진 그 사람만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이 내게는 곧 “시각을 넓히는 것”이다. 나 같은 상담사에게 세상을 보는 것은 곧 사람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상대방의 말에 반격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능력도 있다. 내가 보기에 아니 우리가 보기에 - 물론 그 우리가 누구인가에 따라 또 다르지만 - 우리의 상대방은 아주 교활하고 악하며 한심하고 잘못되었고 욕을 먹어도 당연한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도 상대방에게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들 아시지 않으시는가. 저쪽이 잘못을 했다면 얼마나 했고 우리가 옳으면 얼마나 옳을 것인가? 수많은 가짜뉴스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곧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거기에는 사람에 대한 편견과 판단의 무겁고 높은 벽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 것은 바로 그 벽 너머를 기대하는 새로운 마음의 공간을 가지는 것이다. 내 마음의 공간에 그 세상을 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에는 어떤 불편함이 가득하더라도 내 이해의 폭을 조금만 넓혀서 그에게 있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떠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내 아버지였지만, 내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에게도 나름의 삶이 있었고, 그리고 나는 그냥 단순히 그 삶을 인정해 드릴 수 있을 뿐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그냥 그렇게 다른 이들의 주장과 생각과 분노와 아픔을, 나아가 그들의 삶을 인정해 줄 수 있는 내 마음의 작은 공간을 좀 만들어 보면 어떨까. 굳이 사랑하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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